“연기에 질린다는 인상주면 끝장
관객 시선에 일일이 신경안써요”
정재영(38)은 모호하게 묵직한 배우다.
초벌 다듬기를 마친 석재(石材)와 비슷하다. 어떤 조각가에게 맡기느냐에 따라 경이로운 대작이 될 수도, 덩치만 큰 장식품이 될 수도 있다.
한 영화제작자는 정재영이 악당 두목으로 나온 최근작 ‘강철중: 공공의 적 1-1’에 대해 “그의 경력에 플러스보다 마이너스가 될 영화”라고 말했다.
그는 ‘간첩 리철진’(1999년) ‘킬러들의 수다’(2001년) 등 장진 감독의 영화에서 ‘특별한 조역’으로 얼굴을 알렸다. 하지만 역할의 비중이 커지면서 예전의 의외성을 잃고 ‘평범한 주역’이 됐다는 의견도 나온다.
그는 9월 4일 개봉하는 ‘신기전(神機箭)’에서 주인공 설주 역을 맡았다. 신기전은 조선 세종 때 만든 로켓추진 다연발 화살 병기. 설주는 신기전 제작 비법 전수자인 여인 홍리(한은정)를 보호하는 상단(商團)의 행수다.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재영은 “나름의 고유한 매력이라는 것은 이제 시작한 (나 같은) 배우에게 과분한 말”이라고 털털하게 말했다.
“그런 건 더 대단한 배우에게 어울리는 말이죠. 알 파치노나 로버트 드 니로 같은. 아직도 ‘배우’라는 말을 들으면 장동건 정우성처럼 ‘다른 사람’이 떠올라요. 저는 대중성을 얻어 가는 과정에 있어요. 많은 관객이 봐주셨으니, 강철중은 저에게 무조건 플러스가 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신기전에서 정재영은 드문드문 특유의 삐딱한 유머를 던지지만 역할의 무게에 눌렸다. 목청 돋워 적을 꾸짖는 모습도 낯설고 어색하다. 완전 나쁜 놈(강철중)과 심심한 정의의 용사(신기전)는 날카로운 인상과 대조적인 선한 눈빛을 가진 정재영의 얼굴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느낌을 준다. ‘아는 여자’(2004년)에서의 여백을 기억하는 관객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남의 시선에 일일이 신경 쓰다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돼요. 일의 리듬을 계속 이어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주어진 여건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거죠. 배우가 자기 의도대로 경력을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는 선택하기보다 선택받아야 하는 배우의 운명을 안다. 일생일대의 배역은 애타게 부른다고 오는 게 아니라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것. 그래서 늘 맞을 채비를 해야 하는 것이 그가 아는 배우의 업(業)이다.
“질린다는 인상을 주면 끝이에요. 올림픽으로 따지면 예선 탈락이죠. 피땀 나게 연습했는데 TV 중계도 못 타고 마는 거예요. 그렇게 한 번 시선 밖으로 밀려나면 2년 안에 싹 잊혀져요. 그게 배우의 운명이에요. 신선도를 유지하는 게 늘 첫 번째 목표일 수밖에 없죠.”
출연작을 짚어나가다가 “곧 불혹(不惑)”이라고 했더니 정재영은 펄쩍 뛰며 “내년 돼야 만 서른아홉”이라고 말했다. 데뷔 12년 만에 ‘주류’가 된 그에게 ‘어떤 주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12년 동안 20편 넘게 찍었다고 하지만… 창피해요. 그중 3분의 2의 배역을 합해도 최근 한 편보다 약하죠. 이제 정말 겨우 시작입니다, 그 시작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죠. 꺼내지 않은 카드가, 아직 제법 남아 있어요.(웃음)”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