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연극 '경숙이 경숙 아버지'를 할 때였다. 어떤 마른 여배우가 연습 중 에너지가 넘치기에 배를 만져보니 단단했다.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준비가 철저한 배우구나 싶었다. 그 배우는 곧 TV드라마 '달콤한 인생'(MBC) '태양의 여자'(KBS)와 장진 감독의 영화에서 주요 배역을 맡으며 얼굴을 알렸다. 장영남(35)이었다.
▽조재현=요즘 TV 드라마와 영화에서 맹활약하는데, 엄마가 좋아하시겠네. 예전에 엄마 이야기를 잠깐 했잖아요. 연극한다고 엄마가 때리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면서요.
▽장영남=그럼요. 좋아하시죠. 30대 접어들면서는 맞지는 않았지만,(웃음) 아무튼 요즘 저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시는 것 같아요.
▽조=내 경우도 비슷해요. 아버지께서 내가 TV에 나오니까 그 때서야 인정을 하셨어요. 영남 씨는 극단 '목화' 출신이죠. 유해진 임원희 씨도 그렇고, 그쪽 배우들은 개성이 강하고 연기를 잘 해.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장=목화의 시스템 자체가 사람을 독하게 만드는 거 같아요. 무대 소품과 의상을 밤새서 만들고 작업 중에 연습한다고 나오라면 손에 본드 붙인 채 나와서 연기하니까 아무 잡생각이 안 들었어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도 안 들었어요. 그냥 연기 잘 해서 빨리 넘겼으면 하는 생각뿐이었죠. (웃음)
▽조=추상미와 한채영 씨와 같은 유명인과 연극에서 더블 캐스팅을 많이 했잖아요. 비교된다는 게 어땠어요? 나도 지난해 '경숙이…'에서 더블 캐스팅됐는데 힘들었어요. 안 그런 척 했을 뿐이지.
▽장=2005년 추상미 씨와 더블 캐스팅 된 연극 '프루프'를 할 때가 힘들었어요. 연습실에 가면 한 선배가 공연 전날 관객 반응을 말해줬어요. '어제는 통로까지 관객이 꽉 들어찼다'고. 제 공연 때는 30~40명 만 와 있는데. (웃음)
▽조=그 배우가 철이 없었나보네.
▽장=약이 오르면서도 배우로서는 자극제가 됐죠. 그래, 내가 연극배우로 끝까지 가보겠다 하는….
▽조=한채영씨와 할 때는 두 사람의 티켓 판매가 비슷하게 올라간다기에 연극인으로서 참 뿌듯했어요. 요즘 연극 여배우들은 박정자 윤석화씨가 활약하던 시대처럼 대중성을 갖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장영남이라는 배우의 행보가 참 중요한데, TV나 영화의 진출은 환영하면서도 걱정이 돼요.
▽장=극단에 있을 때 가끔 오디션을 보라는 전화가 오면 "저는 안 합니다"라고 끊었어요. 연기를 잘 하는 것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난해 매니지먼트사에 소속이 되니 타협점을 찾게 되더군요. 지난해 연극만 다섯 편을 했더니 소속사도 별로 안 좋아하고, 저도 눈치가 보이더라고요. 요즘에는 배우로서 성장한다는 것은 입지와 영역을 넓혀가는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조=영남 씨는 대사도 좋고 배우로서 타고난 무언가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장=목소리 들으시면 알겠지만 비음에 허스키해서 좋지는 않아요. 대단한 노력보다 그냥 한 우물을 파다보니 나아진 것 같아요. 이 생각, 저 생각 없이 연극만 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조=그 이야기를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네요. 요즘 배우들은 계획도 잘 세우고 기대도 커요. 그런데 영남 씨는 계획 없이 순간순간 올인 했다는 거죠. 그러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내공이 쌓여있고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때요?
▽장=별 계획은 없을 것 같아요.(웃음) 지금 하는 것만큼만 했으면 좋겠어요. 계속 이렇게 대단한 빛을 안 바라지만 꾸준히 내가 무언가를 한다는 게 의미가 크거든요. 굳이 말하자면 극장을 하나 갖고 싶어요. 10년 후든 20년 후든. 극장을 갖겠다는 일념 하에 정말 '피터지게' 살아보고 싶어요.
TV에서 인기를 얻으면 금세 달라지는 '바보' 같은 배우들이 많다. 1년 전에 봤는데 이 사이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 때면 안타깝고 씁쓸했다. 오늘 만난 장영남은 예전 연습실에서 항상 에너지 넘치는 배가 단단한 연극배우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 더 기쁘고 반갑다.
정리=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 장영남은…
△1973년 서울 출생
△계원예고 연극영화과, 서울예대 연극과 졸업
△연극 ‘서툰 사람들’ ‘멜로드라마’ ‘버자이너 모놀로그’,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 ‘아는 여자’, 드라마 ‘태양의 여자’ ‘달콤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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