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41년 음악가 홍난파 선생 타계

  • 입력 2008년 8월 30일 02시 59분


“조선음악은 대부분이 극히 지완(더디고 느림)하고 퇴영적인(뒤로 물러서서 움직이지 않음) 기분에 싸여 있지만 서양의 음악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쾌 장중하다.”

홍난파(1898∼1941)는 ‘동서양 음악의 비교’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할 정도로 서양음악을 열정적으로 보급하려 했다.

그는 늑막염으로 경성요양원에서 1941년 8월 30일 43세로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음악평론가, 수필가, 소설가, 번역가 등으로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쳤다.

홍난파는 1910년 9월 국악을 배우려고 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YMCA) 중학부에 입학했으나 바이올린을 접하게 된 후 서양음악으로 방향을 바꾼다. 1918년 일본 도쿄음악학교 예과에 입학한 그는 1919년 국내로 들어와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 ‘삼광(三光)’ 창간호를 출판했으나 4호를 내고 폐간한다.

홍난파는 1928년 도쿄에 있는 신교향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입단했고, 1929년에는 도쿄고등음악원 본과를 졸업한다. 그 후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재즈 밴드(Korean Jazz Band)를 만들어 방송활동을 하기도 했다.

1930년 그는 같이 음악활동을 하던 사람들 외에도 안익태, 안기영, 현제명, 채동선, 김원복, 김영의, 독고선, 홍재유, 황재경 등과도 함께 연주활동을 한다. 1931년에는 여러 잡지와 신문에 기고를 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진다.

홍난파의 일생은 일제강점기 내에 한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식민지 시기가 끝나면서 더욱 크게 부각됐다. ‘봉선화’ ‘금강에 살어리랏다’ ‘봄처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와 같은 가곡과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고향의 봄’과 같은 동요는 광복 직후 음악 교과서를 통해 한국인에게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홍난파는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음악가이다. 이는 한국에서 한 음악가에게 부여된 명성으로는 가장 큰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음악에 서려 있는 ‘애수’는 바로 ‘민족의 애수’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의 대표곡인 ‘봉선화’를 비롯해 그가 작곡한 여러 곡이 친일 행위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란을 빚고 있어 그에 대한 최종 평가는 아직까지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다.

안영식 기자 ysa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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