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슨의 유럽행은 미국 대통령으로선 최초의 유럽 방문이었다. “유럽 문제에는 관여하지 말라”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고립주의를 버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승리를 이뤄낸 윌슨에게 유럽 방문은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그 여행은 1차 대전을 법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이듬해 1월부터 열리는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9일 뒤 프랑스 브레스트에 도착한 그는 파리와 런던, 로마를 방문해 환영 인파로부터 ‘유럽의 구원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프린스턴대 총장 출신의 이상주의자 윌슨이 평화회의에서 목도한 것은 유럽의 적나라한 현실주의 정치였다. 독일에 가혹한 배상을 받아내려 혈안이 된, 그리고 영토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못한 유럽의 지도자들에게 넌더리를 냈다.
그가 당초 내건 14개 평화조항 중 유일하게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전후 세계질서 비전을 담은 국제연맹의 창설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안은 미 상원에서 부결되고 말았다.
사실 국제연맹 가입 좌절은 흔히 알려진 대로 미 상원의 고립주의 탓이 아니었다. 오히려 윌슨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그는 상원을 장악하고 있던 공화당 측 인사를 평화회의 대표단에 한 명도 포함시키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다. 더욱이 상원이 국제연맹 창설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겠다며 3주간 열차로 미국 전역을 돌아다녀 의회의 분노를 샀다.
악화된 건강상태는 그의 아집과 독선을 더욱 부추겼다. 그는 몸의 왼쪽 전체가 마비되자 부인 이디스에게 사실상 대통령직을 대행시켰다. 학교 교육이라곤 2년밖에 받지 못한 이디스는 “대통령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써서 장관에게 건네주곤 했다.
윌슨의 국제연맹 가입안은 상원 표결에서 거부됐지만 공화당 측의 수정안은 통과될 가능성이 높았다. 상원의 이른바 ‘강경유보파’는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요구되는 위기상황과 관련해 의회에 이를 평가할 권한이 주어지면 국제연맹 가입을 승인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윌슨은 자신의 구상이 털끝만큼이라도 손상돼선 안 된다며 수정안을 거부하라는 쪽지를 민주당 의원들에게 보냈고 민주당 측의 반대로 수정안마저 부결되고 말았다. 결국 윌슨은 자신이 낳은 맏아들을 제 손으로 죽이고 만 것이다.(폴 존슨의 ‘모던타임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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