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월 어느 날. 벽을 보고 소리치는 22살 여자 아나운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TBS 교통방송 정연주(32) 아나운서. 지난해 3월부터 지금까지 연예인 김흥국과 함께 오후 6시20분~8시 방송되는 '김흥국 정연주의 행복합니다'를 진행 중인 TBS 간판 아나운서다.
당초 이 시간대는 1990년 TBS 개국 이후 17년간 배한성 송도순씨가 진행해온 '함께 가는 저녁길' 차지였다. 간판 프로그램 MC는 연예인 또는 외부인사에 맡겨온 관례를 깨고 정 씨가 이 프로그램을 맡게 되기까지, 그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1998년 그를 울린 사람은 당시 정승원 아나운서 부장이었다.
정 부장은 1997년 12월 입사한 정 아나운서를 포함한 여성 아나운서 2명과 남성 아나운서 1명에게 "나를 웃겨보라"는 과제를 줬다.
정 아나운서는 신문에서 본 유머를 외워뒀다가 부장 앞에 섰다.
"부장님, 경찰이 과속하는 차를 세워서 운전자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너무 낮게 비행을 하셨습니다. 하하하…."
그녀의 목소리엔 흠잡을 데가 없었다. 완벽한 발음, 청명한 목소리, 적당한 높낮이…. 그런데 웃기지가 않았다. 굳은 얼굴로 듣고 있던 정 부장은 버럭 화를 냈다.
"정연주, 저기 가서 벽보고 서있어. 그리고 계속 소리쳐. '나는 왜 이럴까'하고."
'이럴 리가 없는데….'
그동안 누굴 만나도 예쁜 목소리와 정확한 발음을 칭찬받아온 그녀였다. 하지만 라디오는 달랐다. 오로지 목소리에만 의지해서 감정을 전달하고 청취자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데 정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너무 '도덕 선생님' 같다는 게 정 부장의 얘기였다.
● 추웠던 1997년 겨울
수모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얼마 후 정 아나운서는 당초 자신이 합격권이 아니었다는 얘기를 다른 선배로부터 전해 들었다.
면접을 본 김동건(당시 TBS 사외이사) 아나운서가 "쟤는 지금 당장 투입하기는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면 쓸모가 있을 것"이라며 종합 점수 3등 밖이었던 그녀를 적극 추천했다고 했다.
1998년 2월 이화여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기자를 꿈꾸던 그에게 서울시가 운영하는 '마이너 매체'인 TBS 교통방송은 성에 차지 않았다. 하지만 외환위기 때문에 신입사원 선발 자체가 거의 없던 때였다. 정 아나운서는 입사할 때부터 TBS에서 경험을 쌓은 뒤 다른 매체로 옮겨가리라 작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합격 순위권'조차 아니었다니…. 그녀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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