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점도 형편없었고 당연히 그를 높게 평가하는 교수도 거의 없었다. 하루는 '페이퍼 나이프'를 만들어 오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는 이전에 '편지봉투를 뜯을 때 쓴다'는 요상한 서양 물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째서 (일상생활에) 쓰이지도 않는 물건을 만들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숙제인 이상 고민에 고민을 더해 가장 혁신적인 페이퍼 나이프를 만들리라, 다짐했다. 그가 착안했던 디자인 논리는 '페이퍼 나이프란 하루 23시간 59분은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 그런 물건은 당연히 사용가치보다 장식적 가치가 더 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세워놓고 감상할 수 있는 디자인을 제출했다.
평가 당일. 40여개의 페이퍼 나이프가 진열되어 심사를 기다리던 때였다. 유달리 그의 작품만이 서 있는 독특한 모양새였다. 심사를 위해 다가온 교수는 그가 기대했던 칭찬을 단박에 배반해버렸다.
"이건 뭔데 혼자만 서있어?"
강제로 눕혀진 그의 작품은 C학점을 받았다. 매사가 이런 식이었는지 졸업 학점도 미대 전체 꼴지를 기록할 정도였다.
그러나 4년 뒤. 그는 유럽 최고의 디자인 스쿨로 통하는 프랑스 파리 국립장식미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26살 때인 1995년 파리 사무용가구전시회에 출품한 '크레데위앙'으로 세계적 작가로 급부상했다. 세계적 가구회사인 미국 하워드 그룹이 그의 작품을 상품화해 20여 개국에 판매하기도 했다. 이듬해 프랑스 디자인 진흥연구회는 '올해의 신인 디자이너'로 그를 선택했다. 한국 밖에서 더 유명한 디자이너 오준식 (40· 전 이노디자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씨의 드라마틱한 인생 역전 일화다.
● "디자인은 '반짝!'하는 아이디어가 아니다"
"그래픽, 패션, 공예, 인테리어 디자이너…? 왜 디자이너는 다루는 재료에 따라 분류돼야 할까요? 전 언제나 제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디자인 하는 '라이프 스타일 디자이너'였고, 이제는 기업의 목적을 이룰 수 있게 조율하는 '비즈니스 디자이너'라고 정의할 수 있어요."
사람의 공간을 재단하고, 넓게는 환경을 디자인 하는 그의 작업은 곧 책상과 의자의 영역에서 '라이프 스타일' 전반으로 옮겨갔다. 가구 디자인을 위해 인테리어 전반을 고민했고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을 새롭게 정의 내리길 원했다.
"사람들은 디자이너가 설계한 공간에서 생활을 하고 비즈니스 활동을 벌입니다. 사람의 능률과 행복이 바로 공간에서 나오기 때문이죠. 디자인이란 궁극적으로 '사람의 활동을 이롭게 하는 생각의 방식을 재정의하는 활동'이지 단순하게 아름답고 기발한 그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2004년 이노디자인에 합류한 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보다 과감하게 실천에 옮겼다.
자신의 특기를 살려 국내 최고급 극장의 내부설계를 디자인했고, 최고급 아파트들의 브랜드 컨셉및 디자인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또한 서울시가 추진하는 한강 관련 공공프로젝트에도 참여해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심으려 노력했다. 이 밖에도 주요 대기업들의 브랜드 이미지 프로젝트는 물론 한 포털의 온오프라인 통합 서비스 개발에도 개입했다. 가장 최근에는 대전 대덕의 연구개발 특구에서 먹고자며 한국 첨단기술의 실용화 과정을 고민했다.
"실제 디자인은 산업을 활성화시키고 기업에게 돈을 벌게 합니다. 매년 3만5000여명의 디자인 관련학과 졸업생들이 한국에 배출됩니다. 그러나 기업이 이들에게 원하는 것은 기발한 아이디어 혹은 '한국적 디자인'수준에 그치고 있어요. 하지만 디자인이란 절대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 "디자인은 논리다"
그가 "디자이너란 문제를 해결하는 직업"이라고 믿는다. 이 때문에 디자인에서도 체계적 논리성을 강조하며 디자인을 시작하기 이전에 자신의 아이디어와 감수성을 모두 글로 풀어놓는 작업을 먼저 한다.
"세상에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잖아요. 디자이너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예요. 컨설팅 회사가 문제점을 파악하는데 집중한다면 디자인이란 그 문제점을 파악해 실질적인 해결책을 내놓은 직업이라고 할 수 있죠."
잘 정리된 글은 80%의 형태를 만들어 낸다. 그 바탕 위에서 사람들은 소통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20%만이 디자이너의 크리에이티브 영역, 즉 글의 논리를 손에 잡히는 형태로 전환시켜내는 일이다. 디자인에서도 사람들을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논리의 힘이고 말의 힘인 것이다.
활동의 외연을 넓혀오면서 그를 수식하는 타이틀은 '가구 디자이너'에서 '비즈니스 디자이너'로 변신했다. 비즈니스란 예술 대신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논리가 뚜렷해야 사람들이 공감하고 아름다움도 느끼게 된다. 디자인이란 세상에 이롭고 돈을 벌게 해주는 실용적인 예술이라는 얘기다.
그는 '한국적 디자인'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다. 그가 한국 밖에서 관찰한 '한국적 디자인'이란 무국적적인 디자인의 전형에 가까웠다.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한국적인 디자인이란 규범적인 이미지(태극무니, 처마, 한국화 등…)의 반복이 아니다. 사람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논리와 철학이 바로 디자인의 바탕이자 경쟁력의 근간이다. 그가 프랑스의 활동을 접고 한국에 돌아온 근본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문화에 태생(Origin)이 중요한 것은 아니거든요. 한국에서 꽃을 피운 문화가 바로 가장 한국적일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전 단순히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한국 작가에 머물고 싶지 않고 한국에서 활동하되 세계적인 작가가 되고 싶은 야망이 있어요. '한국적 디자인이란 무엇일까?'하는 질문 자체를 재정의하고 싶은 거죠."
● "나눔의 디자인으로 나아가자"
그의 표현에는 버터향이 났지만 실제 그의 디자인을 보면 철저하게 한국적이다.
그의 출세작인 공공장소 의자 '크레데리앙(Credeliens·인연만들기)를 살펴보면 가장 한국적인 소재인 평상을 기초 디자인으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모여앉아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는 평상의 기능을 공공장소에 절묘하게 대입한 것이다.
그가 세계적으로 히트시킨 '세미서클 테이블' 역시 서구 문화에는 없는 한국의 소반에서 아이디어를 구했다. 그는 언제나 익숙한 논리에서 특출한 것을 도출해 냈지 특별함을 위해 일부러 낯선 새로움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20대 천재 디자이너로 시작해 30대에 한국 디자인의 영역을 넓혔던 그의 디자인 인생은 올 1월 이노디자인 생활을 마감하며 마흔의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할 시점에 이르렀다.
"디자인이란 나를 새롭게 하고 산업을 활성하게 만들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어요. 이제는 꼭 돈만을 추구하는 풍요가 아니라 디자인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국제적인 나눔의 문화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실제 그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실용적인 디자인 제품들을 개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일을 길게 설명하는 대신 물을 긷는 아프리카 소녀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의 소녀는 물을 긷기 위해 하루 4시간을 걸어도 고작 10리터만 나를 수 있었다. 이 소녀를 위해 한 디자이너가 개발한 물통은 커다란 타이어 모양의 'Q드럼'. 한번에 75리터의 물을 담고도 줄을 끼워 손쉽게 굴릴 수 있게 디자인된 물통이었다.
"제가 구현하고 싶은 디자인의 힘이란 바로 이 사진에 담겨져 있습니다."
정호재 기자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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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닷컴 이 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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