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여백]만화가 김수정

  • 입력 2009년 1월 9일 02시 58분


재즈에 흠뻑 빠진 둘리아빠

“끈적한 선율서 인생 배워요”

《“재즈가 뭔가요?”

‘둘리 아빠’는 수북이 쌓인 음반들 사이로 한 장의 CD를 꺼냈다. 바로 스파이크 리 감독의 1990년 영화 ‘모 베터 블루스(Mo’ Better Blues)’의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 앨범. 플레이어 속으로 빨려 들어간 CD는 색소폰 연주자 브랜퍼드 마살리스의 온화한 연주 소리를 뿜어냈다. “재즈란, 지금 나오는 음악과도 같아요. 힘들고 고단한 흑인들의 인생, 하지만 결국엔 푸근한 느낌이 마치 우리네 인생과 같죠. 재즈도, 내가 그리는 만화도 모두 삶 그 자체 아닐까요?”》

인생 위기때 우연히 접해

괴로울때 최고 위안거리

재즈 스타일 주제가 담긴

만화영화 제작도 구상중

뽀글뽀글 곱슬머리의 ‘김 파마 아저씨’가 재즈를? 지난해 12월 말 서울 서초구 방배동 김수정(58) 씨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재즈 향기가 가득했다. 거실 한 편에 세워진 재즈 CD부터 그의 방을 가득 메운 수백 장의 LP는 ‘블랙커피’만큼이나 진하게 느껴졌다. 둘리 아빠로 살아온 지 25년째. 최근 그는 ‘아기 공룡 둘리’의 TV 만화 시리즈를 21년 만에 부활시켰다. 8일부터 SBS에서 주 1회 총 26부작 방영을 시작한 것. “괴롭고 힘들 때 불 다 끄고 재즈를 틀어놓으면 ‘쥑이죠’”라며 웃는 둘리 아빠 아니, 재즈 마니아. 그의 삶은 얼마나 재즈와 맞닿아 있을까?

○ 성공, 도피 그리고 재즈

그가 재즈에 빠져든 것은 20년 전인 1980년대 후반. ‘아기 공룡 둘리’가 빅히트를 치며 데뷔 10여 년 만에 빛을 볼 때였다. 모든 것이 순탄하게 돌아갔지만 그는 아내와 결혼생활에 갈등을 빚으며 내적으로 곪아가고 있었다. 성격은 공격적으로 변했고, 순탄했던 인간관계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결국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그는 만화 연재를 펑크 내고 산 속으로 잠적했다. 전국의 절을 돌며 불교음악을 듣던 그는 어느 날 ‘봄의 노래’로 유명한 원로 만화가 박문윤 화백을 만났다. 재즈 마니아로 통하던 박 화백에게 그는 어느 이름모를 재즈 한 자락을 소개받았는데, 들은 지 몇 분 후 그는 그 자리에서 녹아버렸다.

“침전하는 느낌이랄까? 혼란스럽던 감정들이 착 가라앉더군요. 그전만 해도 재즈는 어렵고 시끄러웠는데 삶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어요. 그 후 서울 태릉 근처의 재즈카페 ‘몽’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고, 대학로 앞 ‘바로크 레코드’ 음반점에 들러 재즈 음반을 하나둘 사 모으기 시작했죠. 지금은 모두 자취를 감췄지만….”

1994년 둘리의 아들인 ‘돌리’가 나오는 후속편(베이비 사우르스 돌리)으로 컴백하기까지 그는 1950∼1960년대 고전 재즈를 들으며 마음을 달랬다. 도피생활을 접고 다시 펜을 잡기까지 전적으로 힘이 돼 준 것은 재즈였다. 메모지와 볼펜을 들고 다니며 레코드 가게에서 좋은 노래가 흘러나오면 그는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곡목과 앨범 제목을 적었다. 그렇게 그는 루이 암스트롱,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번스, 팻 메스니,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여성 멤버이자 쿠바 재즈를 대표하는 오마라 포르투온도 등의 음반을 사 모았다. 그중 그가 꼽는 최고의 재즈 명반은 영화 ‘화양연화’의 OST 음반.

“8년 전 극장에서 봤는데 너무 지루하더라고요. 그런데 냇 킹 콜의 ‘퀴사스, 퀴사스, 퀴사스’ 같은 스탠더드 재즈곡들이 흘러나오자마자 영화에 빨려 들어갔죠. 여러 번 되돌려보면 처음 감동에 흠집이 날까 봐 지금 이 영화 DVD는 고이 모셔두고 음반만 듣고 있어요.”

○ 둘리, 인생 그리고 재즈

재즈 마니아답게 그는 오디오에도 신경을 쓴다. 거실에 놓인 대형 진공관 스피커와 앰프는 모두 영국 ‘탄노이’ 제품으로 각각 800만 원을 주고 구입했다. 이것이 현재 그가 즐기는 ‘메인’ 음향기기라면 그의 방에는 과거 그가 들었던 오디오 조각들이 쇠붙이처럼 쌓여있다. 단순히 ‘미련’ 때문에 못 버리는 건 아니었다.

“내가 작업하는 곳에는 늘 오디오를 두고 재즈를 켜놓죠. 한참 듣다 정신이 몽롱해질 때쯤 ‘이런 명품 음악에 어울리는 좋은 만화를 그려야지’라고 내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을 해요. 재즈를 통해 만화의 기를 받는다고 할까요?”

2% 부족하다 싶을 때 그는 ‘비니’ 모자를 눌러 쓴 채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재즈바 ‘올 댓 재즈’에 간다. 그곳은 그에게 매일 밤 재즈 밴드들의 즉흥 연주가 펼쳐지는 곳이자 자신과 같은 재즈 마니아들이 맥주잔을 부딪치는 곳, 그리고 자신의 고민을 들어줄 선배 만화가들이 기다리는 곳이다. 방배동 집에서 기자와 함께 ‘올 댓 재즈’로 건너 간 그는 차 한잔을 들이켜며 속 깊은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요리보고 조리보고’ 하는 경쾌한 둘리 주제가를 탈피해 새로운 주제가를 만들고 싶었는데 쉽지 않아요. 1996년에 둘리 극장판인 ‘얼음별 대모험’에서 주제가를 재즈로 편곡했는데 반응이 신통치 않았거든요. 30억 원 가까이 투자한 이번 26부작 만화에도 주제가를 재즈로 만들까 했는데…. 둘리 만큼 재즈와 어울리는 만화도 없다고 생각해요.”

만화 속 둘리와 고길동은 대립각을 세우며 살고 있지만 정작 둘리는 엄마와 떨어져 인간 세상에서 살아야 하고, 고길동은 소시민으로서 이들을 안고 살고 있다. 그는 “각자 나름의 아픔을 하나씩 안고 살아간다”며 그런 아픔을 재즈에 비유했다. 그래서 그는 악동 둘리의 분위기에 맞는 퓨전 재즈 스타일의 주제가를 여전히 꿈꾸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꼬마 저승사자 이야기를 다룬 1985년 작 ‘아리아리 동동’을 재즈 음악과 함께 엮은 만화영화를 구상 중이다.

왜 그토록 그는 재즈에 목을 맬까? 대답은 간단했다.

“5공 시절 ‘아이들 정서에 맞지 않는다’며 애써 만든 내 만화가 가위질 당할 때 정말 가슴이 아팠죠. 1990년대에는 미국 ‘워너브러더스’사와 계약을 하고 미국 진출을 앞뒀지만 외환위기로 무산됐죠. 모두 내 아픔이자 내 인생이죠.”

20년 전 재즈를 들으며 고통을 이겨냈듯이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감동을 받을 누군가가 있으리라 믿고 있다. 그들에겐 그의 만화 한 편이 가장 ‘끈적한’ 재즈 한 곡인 것처럼.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 만화가 김수정은

명랑만화 대표주자… 올봄 ‘뮤지컬 둘리’ 준비

1975년 만화 ‘폭우’로 데뷔한 김수정 화백은 1983년 4월 만화잡지 ‘보물섬’에 ‘아기 공룡 둘리’를 연재하며 인기를 얻었다. 이후 TV 만화영화 ‘아기 공룡 둘리’(1987년)와 극장판 ‘얼음별 대모험’(1996년)까지 만들어지면서 국내 명랑 만화계의 대표 주자로 떠올랐다. 2000년에는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현재 만화 제작 회사인 ‘둘리나라’ 대표 이사로 올해 5월 어린이 뮤지컬 ‘아기 공룡 둘리’의 공연을 준비 중이다.


▲ 사진부 김미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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