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세인트루이스 도심 뒷골목의 침침한 집에 사는 23세의 처녀 로라 윙필드.
고등학교 때 짝사랑했던 짐이 집에 찾아오자 그녀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춤을 춘다. 잠깐의 행복 뒤에 닥칠 비극을 예고하듯 그들이 춤추는 동안 유리로 만든 유니콘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고 로라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현실을 두려워하는 로라는 온종일 유리 동물들을 벗 삼아 지낸다. 풍요로운 남부에서 처녀시절을 보낸 로라의 어머니 아만다는 딸의 소심한 성격을 질책하며 ‘젊은 신사’를 만나게 하려고 안달이다. 로라의 남동생이자 구두창고에서 일하는 톰은 어머니의 재촉에 못 이겨 동료 짐을 집으로 초대한다. 하지만 로라의 마음을 빼앗은 짐은 “애인이 기다린다”며 금세 떠나버린다. 1945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른 ‘유리동물원(The Glass Menagerie)’은 테네시 윌리엄스를 유진 오닐, 아서 밀러와 함께 20세기 미국 최고의 극작가로 끌어올린 출세작이다.
1911년생인 그의 본명은 토머스 러니어 윌리엄스 3세. 윌리엄스 가문은 테네시 주의 상원의원, 주지사 등을 배출한 남부의 뼈대 있는 집안이었지만 할아버지 대에 급격히 몰락해 아버지 코넬리우스는 구두 외판원으로 일했다.
알코올의존자였던 아버지는 병약하고 독서를 좋아하는 소년 윌리엄스를 ‘미스 낸시’라 부르며 놀렸다. 목사의 딸인 어머니 에드위나는 아름답지만 히스테리가 심한 남부 여성이었다. 가족 중 가장 가까웠던 두 살 위 누이 로즈는 취업전선에 내몰렸다. 그녀는 실연의 아픔을 겪으며 신경쇠약에 걸렸고 뇌수술을 받은 끝에 요양원에서 숨졌다. ‘유리동물원’은 윌리엄스가 겪었던 현실의 비극을 희곡으로 옮긴 복사판이었던 셈이다.
엘리아 카잔이 감독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년)는 퓰리처상을 받은 윌리엄스의 희곡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남부 명문가 출신인 여주인공 블랑슈(비비언 리)는 몰락한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파멸과 자기분열로 빠져든다. 이 영화에서 처형인 블랑슈를 성폭행하는 동물적 남성상을 연기한 말런 브랜도는 일약 스타가 됐다.
감상과 퇴폐, 환상이 뒤섞인 윌리엄스의 연극은 1950년대 내내 높은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인종문제, 베트남전쟁 같은 사회성 짙은 현안들이 등장하자 그의 연극은 외면받기 시작했다. 술과 마약에 빠져들고도 펜을 놓지 않았던 윌리엄스는 1983년 2월 25일 뉴욕 맨해튼에 있는 호텔 엘리제의 객실에서 플라스틱 약병 뚜껑이 목에 걸려 질식해 숨졌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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