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농심 본사 도연관. 무대 위 대형 스크린에 한자어가 가득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가 조선왕조실록 연속강좌의 일환으로 마련한 ‘정조실록학교’의 개강일.
손욱 농심 회장(사진)이 25일 ‘조선의 혁신군주, 정조’를 주제로 첫 강의를 맡았다. 그는 삼성SDI 사장과 삼성종합기술원장을 지내며 ‘6시그마 전도사’ ‘혁신 CEO’로 잘 알려졌다.
정조를 혁신 모델로 주목한 이유를 그는 “당시 조선은 사회와 이념체계가 복잡해지면서 갈등이 표출되고, 백성을 움직이는 힘도 다양해진 시기였습니다. 정조가 ‘지금 고치지 않으면 장차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죠. 지금의 시대상황과 상당히 비슷합니다”라고 말했다.
정조는 △신도시 건설(수원화성) △시장 자유화 및 공정거래 정착(신해통공·기존 상인의 독점권 폐지) △적극적 인재양성(서얼허통·서얼출신을 고루 등용)에 나서면서 개혁드라이브를 걸었다.
하지만 정조의 개혁은 스스로가 말년에 “도무지 효과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밝혔을 정도로 미완에 그쳤다. 토지제도 개혁은 아예 추진되지 못했고 언관의 권한을 약화시킨 언론개혁은 공론정치를 위축시켜 정조의 사후 세도정치의 씨앗이 됐다.
손 회장은 정조의 실패 이유를 포용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정조는 듣기보다는 가르치는 군주였습니다. 수평적 의사소통을 통해 협력과 포용을 이끌어내는 데 부족했죠. 그 결과 개혁을 함께 이끌 동지를 찾기 힘들었습니다.”
한국의 지도층도 새겨들어야 할 교훈이다. 손 회장은 “다수 야당에 둘러싸여 있던 정조보다 지금은 여당이 다수인데도 더 어려운 것 같다”면서 “생각이 다른 세력을 어떻게 한마음이 되도록 포용해야 할지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삼성이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신(新)경영’을 완성한 것처럼 한국사회가 경제위기를 변화와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능력 있는 리더는 위기를 하늘이 준 기회(天時)로 봅니다. 국민 각자의 마음에 숨어 있는 자신감과 변화의 불씨를 되살려 긍정의 불길이 번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