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1>경제개발의 길목에서 ①

  • 입력 2009년 4월 1일 02시 59분


남덕우 전 국무총리(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1987년 5월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에서 동문상을 받는 모습. 남 전 총리는 이 학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귀국해 대학 강단에 섰다. 사진 제공 남덕우 전 국무총리
남덕우 전 국무총리(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1987년 5월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에서 동문상을 받는 모습. 남 전 총리는 이 학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귀국해 대학 강단에 섰다. 사진 제공 남덕우 전 국무총리
① 1960년 미국에서 돌아오다

1960년 8월, 나는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 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미국에서의 학생 생활을 통해 나는 실로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찍부터 대학교수가 천직이라고 생각해 왔던 나는 이제부터 제대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실력 있는 경제학자가 돼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는 이 나라의 대학과 교수 생활에 대한 나 자신의 뼈저린 반성에서 온 것이었다. 당시 한국의 대학은 진정한 의미의 대학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강의에 출석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다. 교수들은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여러 대학에 출강하는 ‘보따리 장사’를 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결강이 빈번해 한 학기에 한 교과를 끝내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제 천신만고로 학위를 받게 됐으니 고국에 돌아가서 미국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 동안 시험에 쫓겨 미뤘던 공부도 다시 해 봐야지.’

이런 포부를 갖고 서울로 돌아왔다. 나는 귀국 후 국민대로 복귀해 내 각성을 행동으로 옮겨보려 했으나 당시 환경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느껴졌다. 그러던 차에 연세대에서 서강대로 자리를 옮긴 이승윤 교수와 자주 만나게 됐다. 이 교수는 어느 날 서강대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곳으로 옮겨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알고 보니 서강대는 미국 예수회가 창설한 대학으로, 미국의 교육방식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고 교수진은 대부분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돌아온 사람들로 구성돼 있었다. 보수도 다른 대학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다는 것이었다.

몸담았던 대학을 떠나는 일이 쉽지는 않았으나 일생에 관한 문제니 용기를 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1964년 9월 이 교수의 주선으로 서강대로 가게 됐다.

당시 서강대에서는 미국 대학 기준에 따라 교수가 일주일에 9시간의 강의를 맡으면 됐다. 덕택에 나는 1960년에 착수한 ‘가격론’의 집필을 계속해 1965년에 초판을 냈다. ‘가격론’은 한국에 처음으로 미시경제학을 소개할 목적으로 썼고, 알기 쉽게 쓰기 위해 적지 않은 고생을 했다. 나는 가격론 이외에 경제발전론, 경제학설사 등을 주로 강의했는데 여기저기서 강의 요청을 받고 동분서주했다. 그에 더해 박영사가 출판한 ‘경제학대사전’을 편집하는 격무를 맡기도 했다.

1964년 ‘경제학대사전’의 편집작업이 끝나 갈 무렵 미국 경제원조 기관인 유솜(USOM·미국 대외원조처)으로부터 통화정책에 관한 정책연구를 위촉받았다. 미국 기관이 한국인 교수에게 정책연구를 위촉하기는 경제학에 관한 한 이것이 최초가 아닌가 싶다. 이승윤, 김병국 교수와 공동으로 이 연구를 시작한 후 우리 연구실에는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수개월의 작업 끝에 1966년에 ‘통화량의 결정요인과 통화정책’이라는 연구보고서를 유솜에 제출했고 이는 국영문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보잘것없는 분석이지만 당시로서는 유솜 당국과 학계의 주목을 받았던 것 같다. 이 보고서에서 소개한 ‘본원적 통화’와 ‘통화승수’는 이후 이 나라 통화관리의 주요지표로 사용돼 왔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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