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점상 청각장애 할머니, 300만원 익명 쾌척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4월 7일 02시 54분


20년전 서울대 간 막내아들 군대서 사망
“막둥이가 못다한 공부 친구들이 했으면…”

“아들이 저 건너에서 금방이라도 뛰어올 것 같아 20년 넘게 기다렸어요.”

경북의 한 중소도시에 사는 김모 할머니는 20여 년 전 막내아들을 잃었다. 시장 한편 노점상에서 채소를 팔아 서울대에 보낸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갑작스레 군에서 사망 통지서가 날아왔다. 할머니는 며칠 동안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보냈다. 형 둘과 누나 모두 장성해 가정을 꾸렸지만 가슴 한구석이 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문득문득 가슴에 묻은 아들이 밟혔다.

“지금쯤이면 막둥이네 애들도 한창 용돈 달라고 조를 나이일 텐데….”

그러던 중 할머니는 지난해 4월 5일자 동아일보 창간특집 기사 “30년 전 작은 ‘씨앗’이 ‘거목’으로 자라 뿌듯”을 보게 됐다. 혼자 노점상을 하며 3남 1녀를 키우던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멎는 것 같았다.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쓸 줄 모르는 할머니였지만 자식에겐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부모 마음은 똑같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시장을 지켰어요. 단속반한테는 또 얼마나 시달렸는지 몰라요. 그래도 애들 공부시키려면 하루라도 거를 수 있겠어요? 지금도 어디선가 내가 그때 느꼈던 아픔을 느끼는 부모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 부모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할머니는 지난해 5월 11일 동아꿈나무재단에 300만 원을 기탁했다. 기탁금을 건네면서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돈이 쉽게 안 모였다”며 오히려 부끄러워했다.

청각장애 4급인 할머니는 단속이 뜸한 오후 시간에 잠깐 좌판을 벌이는 게 돈벌이의 전부다. 한 달에 70만∼80만 원만 벌어도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300만 원은 할머니가 서너 달 동안 꼬박 시장을 지켜야 손에 쥘 수 있는 돈이다.

할머니는 “이 돈은 내가 내는 게 아니라 우리 막둥이가 자기가 못다 한 공부를 다른 친구들이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맡긴 돈”이라면서 “적은 돈이지만 꿈나무처럼 무럭무럭 키워서 불우한 학생들의 학자금으로 쓸 수 있게 부탁한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며 한사코 실명 공개를 거부했다.

지난해 8월 동아꿈나무재단 후원으로 3박 4일간 해외연수를 떠나는 특수교사들이 출국에 앞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동아꿈나무재단
지난해 8월 동아꿈나무재단 후원으로 3박 4일간 해외연수를 떠나는 특수교사들이 출국에 앞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동아꿈나무재단

100만원으로 시작한 꿈나무 기금, 122억 거목으로
작년 403명에 장학금 지급 특수학교 교사 연수지원도


동아꿈나무재단이 올해로 설립 24주년을 맞았다.

 동아꿈나무재단은 실향민 출신 농부 오달곤 씨(1985년 작고)가 1971년 100만 원을 기부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6·25전쟁 당시 찌그러진 냄비 하나만 들고 월남한 뒤 감귤농장을 운영하며 돈을 모아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인 2020년부터 가난한 영재를 위해 써 달라”고 말했다.

동아일보는 1974년 박정희 정권의 광고탄압 때 독자 1만여 명이 보내 온 격려광고 성금 1억2000만 원을 재단 출연금에 포함시켰다. 1985년 동아일보가 총 3억 원을 출연해 재단을 설립했고, 1995년 2억 원을 더 출연했다. 1986년 독지가 권희종 씨가 30억 원 상당의 토지재산을 내는 등 해마다 증자했다. 오 씨 등 224명이 1971년부터 동아일보와 동아꿈나무재단에 보내온 ‘꿈나무 기금’을 2002년 재단기금으로 합쳤다. 지난해 6월 현재 기본재산은 118억9700여만 원, 지난해 7월 이후 기탁금 3억여 원을 합하면 총기금은 122억여 원이다.

재단은 지난해 대학생 214명, 장애학생 166명, 고교생 23명 등 모두 403명에게 장학금으로 2억5000여만 원을 지급했다. 교육기관 지원금으로 1억6500여만 원, 청소년 선도사업비로 8500만 원이 쓰였다.

또 특수학교 교사 50여 명을 선발해 선진국 특수교육 환경을 둘러볼 수 있는 연수 프로그램도 지원했다. 신체장애인 지원금으로 쓴 기금은 모두 5400만 원이다.

독도 연구비로 5년간 총 1억 원을 지원해 지난해 6월 독도 울릉도 종합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 심포지엄을 통해 “생물학적으로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사회와 학계의 큰 호응을 받았다.

재단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새터민(탈북자)과 독립유공자 후손을 위한 장학금 사업, 장학금을 내고 돌아가신 분들의 뜻을 기리는 추모비 건립 사업을 계속한다. 재단이 지난해 사용한 사업비는 총 6억1412만 원이었다.

재단은 고액 기탁자들의 사연을 엮은 ‘동아꿈나무문고’를 펴내고 특수교사들의 수기를 공모해 ‘선생님의 땀 방울’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