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은 나에게 담배를 권하면서 자신도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나는 그동안 있었던 세무공무원 숙정 결과, 통화관리 실태, 신문 지상의 소용돌이, 긴축정책의 필요성을 차례로 설명했다. 긴축정책이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며 옛날 일본의 한 대장대신은 긴축정책을 밀고 나가다 암살당한 일도 있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고 나서 “현재의 은행장들은 그동안 수고가 많았습니다마는 임기가 돌아오는 대로 모두 교체할 생각입니다”라고 말했다.
“왜 그렇지?” 하고 대통령이 반문했다.
“각하, 지금과 같이 금융이 정치와 유착된 상태에서 금융부정과 부패를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과 정치의 밀착 관계를 끊어야 할 것 같습니다.”
대통령은 잠시 말이 없다가 이렇게 분부했다.
“장관, 그렇게 하시오. 그놈의 정치 때문에 부정부패가 생기는데 이대로 갈 수는 없지 않소. 소신대로 해 보시오.”
대통령에게 보고를 끝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청와대를 나오면서 앞으로 이런 지도자에게 기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후 임원을 임면할 때는 은행장의 추천 외에는 어떠한 외부 압력도 배제하겠다고 선언했고 임기가 만료된 은행장들은 예외 없이 교체했다. 후임자를 부장급에서 승진시키기로 했는데 나 자신은 은행 사람들을 모르니까 한국은행 행원 시절 내 상사였던 김성환 한은 총재와 금융통인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의 의견을 많이 따랐다. 그러자 권력층 일부에서 신임장관이 관록 있는 은행장들을 내쫓고 풋내기 인물들을 등용한다고 비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융계의 ‘거물’로 알려진 한 은행장을 교체할 차례가 됐는데 그 전날 대통령비서실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대통령께서 들어오라고 하신다기에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은행 인사문제인 것 같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청와대로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박 대통령은 공화당 당의장이 와서 한 은행장의 유임을 직소하고 돌아갔으니 청을 들어주는 것이 어떠냐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하면 지금까지의 정책이 수포로 돌아가고 금융계가 나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금융-정치 유착 부패방지 절실
朴대통령 “소신대로 해 보시오”
임기 끝난 은행장들 모두 교체
대통령은 난감해하는 눈치였으나 “알았어, 그대로 해. 그 대신 당 의장에게 잘 보이도록 해!” 하고 내뱉는 말투로 말씀했다. 나는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한 다음 재무부로 돌아와서 출입기자단에게 내일 있을 인사를 미리 발표했다.
그러나 외부 압력을 배제하기 위한 나의 인사정책은 한계를 드러냈다. 은행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취지에서 이사의 선임은 은행장의 추천에 따르겠다고 공언했더니 외부 압력이 은행장에게 집중됐다.
어느 날 한 은행장이 이사 임명을 위해 나를 찾아왔다. 그는 후보 명단을 내보이면서 “사실은…”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제1순위로 이 사람을 적었으나 실은 제2순위자가 능력이나 은행 내의 신망 면에서 앞선다는 것이었다. 즉, 그는 제2순위자가 적임인데 외부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1순위자를 추천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크게 화를 내고 제2순위자 위에 사인을 했다. 그는 청탁한 사람에게 자기는 제1순위로 추천했는데 장관이 다른 사람을 찍었다고 했을 것이다.
은행장들은 외부 청탁에 시달리고 또 약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청와대에 건의해 인사를 부탁하거나 융자 청탁을 한 사람이 있을 경우 이를 청와대에 보고하면 신분을 보호해준다는 공문을 은행장들에게 보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나와 가까운 국회의원이 걸려들어 대통령의 경고장을 받게 됐다.
결국 은행을 민영화하지 않는 한 은행의 자율화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