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엔 그 방법밖에 없었죠”
《1965년경 경북 경주시 기차역. 30대 여성 1명과 남성 2명이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승객들이 가득 찬 객실에서 이들은 허름한 사과 궤짝을 선반 위에 올렸다. 열차가 출발했다. 이 여성은 긴장된 눈빛이었지만 짐짓 궤짝을 쳐다보지 않는 척했다. 이들은 창문에 흰 종이를 붙인 뒤 열차가 설 때, 역을 서지 않고 통과할 때, 터널을 지날 때마다 그 횟수를 ‘정(正)’자로 기록했다. 더 이상한 건 기차가 역에 설 때마다 남성 1명이 플랫폼에 내려 두리번거리다가 기차가 떠날 때쯤 다시 타곤 한 것이다.》
“유물 촬영할 사진기 없어
장관 설득해 예산 타내”
국내 첫 박물관학 유학도
이 일행 중 여성은 바로 이난영 국립박물관 학예연구관(75·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이었다. 궤짝 안에는 서울로 이송할 신라 금관이 있었다. ‘정’자 표시는 졸음을 막기 위해서였다. 정차 때마다 내린 이는 홍빈기 학예연구사(전 국립공주박물관장·작고). 기차의 우편 화물칸에 실린 다른 유물이 탈이 없는지 감시했던 것이다.
“지금 그렇게 옮기면 파면감이죠.” 당시 박물관 상황이 그만큼 열악했다. 이 전 관장은 1960년대의 ‘허허실실 금관 이송 작전’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놓았다.
한국 여성 최초 고고학자, 여성 최초 박물관 학예연구사, 여성 최초 국립박물관장. 이 전 관장에게 붙은 수식어다. 그는 1957∼1993년 36년을 박물관에서 보냈다. 이영훈 국립경주박물관장이 이 전 관장을 경주박물관에서 만났다.
이영훈=박물관에 여성이 거의 없던 시절 박물관에서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이난영=당시 박물관 학예관보 승진시험 제도는 2명 이상 응시해 점수가 높은 사람이 임명됐는데 저는 들러리를 서야 했어요. 백지 시험지 내기도 싫고 붙어야 보직받기 힘들었죠. 합격해도 승진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강요받았습니다. 발굴을 하고 싶었지만 여자가 혼자라 숙소 문제부터 걸렸죠. 유적 대신 박물관 창고를 ‘발굴’해 보라는 김재원 초대 국립박물관장의 권유로 1967∼1969년 일본, 미국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 박물관학을 공부했습니다.
1966년 한일협정으로 반환된 문화재 1430여 점 중 국립박물관이 받은 430여 점 유물의 등록도 이 전 관장 몫이었다. 일제강점기 경주 노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굵은 금제귀고리와 금제 목걸이가 이때 제짝을 찾았다. 귀고리 한 쪽과 목걸이 절반이 일제강점기에 반출됐던 것. 이 관장은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으나 한국에 남아 있던 반쪽은 조선총독부박물관 시절의 등록번호로, 일본서 돌아온 반쪽은 광복 뒤 입수된 박물관 소장품 번호로 등록돼 유물번호는 여전히 문화재 약탈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영훈=1969년 덕수궁미술관(일제강점기 이왕가미술관의 후신)과 국립박물관의 통합으로 인수한 덕수궁미술관의 소장 유물을 등록하면서 유물을 유형, 연대, 출토 지역에 따라 분류하는 체계적 박물관학을 한국 박물관에 도입했습니다.
이난영=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고려청자상감석류무늬대접 사진을 붙인 유물 카드를 보여줬죠. 이런 고려청자는 얼마든지 있으니 사진 붙은 유물 카드가 없으면 누군가 시중에서 비슷하게 생긴 싼 자기로 바꿔도 속수무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렇게 설득해 예산을 타내 사진기를 구입했는데 셔터 수명이 다할 정도로 유물이 많았지요.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이 부산대박물관에 대여한 청화백자주전자 등이 사라졌을 때도 이 전 관장이 만든 유물 카드가 힘을 발휘했다. 도둑은 순찰 시간을 피해 엄지만 한 철책을 잘라 유물을 훔쳐갔다. 이 전 관장은 유물 카드상의 사진을 수십 장 인화해 경찰에 제공했고 얼마 뒤 도난된 유물의 거래 현장에서 범인이 잡혔다.
이영훈=1970년대 발명하신 ‘매니큐어 유물번호 관리법’은 지금도 많은 대학 박물관과 발굴 현장에서 쓰입니다.
이난영=손톱에 얼룩이 있는 채 매니큐어를 발랐는데 얼룩이 비치더군요. 유물에 기록한 번호 위에 투명 매니큐어를 바르면 번호가 지워지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박물관에 매니큐어 구입 청구를 했더니 “박물관에 매니큐어를 사달란다”고 난리가 났죠(웃음).
이 전 관장은 1993년 경주박물관장 퇴임사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이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려는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광복 이후 50여 년간 5곳을 전전한 역사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국민의 재산인 유물이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박물관 창고지기’라 부른 이 전 관장은 “문화유산은 지금의 우리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에겐 잘 관리하고 잘 보관했다가 후세에 넘겨줘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정리=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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