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 한국은 내우외환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앞으로 설명하는 8·3조치, 방위세, 중화학공업 투자는 이 위기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1971, 72년의 위기 상황을 간략히 짚어보기로 한다.
북베트남의 호찌민이 남베트남을 공산화하기 위해 벌인 무력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일으켰는데 한국을 포함한 참전국의 노력은 점차 실패할 기색이 농후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내외의 압력을 받고 있던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한다고 선언했다. 이때 그가 발표한 새로운 대외정책은 이른바 ‘닉슨 독트린’으로 알려졌는데, 그 주요 내용은 이제 미국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포기하고 앞으로 공산주의와 투쟁하는 다른 나라 일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며 공산주의 국가를 무조건 적대시하지도 않겠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1973년 1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돼 그해 봄에 사이공 정부의 외국 지원군들은 전부 철수했다. 남베트남이 공산화되자 주변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도 비슷한 경로로 공산화돼 이로 인해 이른바 도미노 이론이 유행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베트남 다음에는 한국이 공산화될 위협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닉슨 독트린에 따라 이미 1971년 3월 한국에서 미국 제7사단이 철수해 휴전선 155마일 경비를 국군이 담당하게 됐으니 국민의 안보 불안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안으로는 1971년 4월 대선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이 제7대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여당인 공화당이 다수당(113석)이 됐지만 정치적 불안은 한층 고조됐다.
김대중 후보는 박 정권이 종신총통제를 획책하고 있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학생들은 교련(학생에게 가르치는 군사훈련) 반대 데모를 확산시켰다.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 씨 등이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해 반독재 투쟁을 선언했고, 천주교주교단은 부정부패와 빈부격차 시정을 요구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수도경비사령부 장병 30여 명이 고려대에 난입하는가 하면 각 대학에서 반정부운동이 확산돼 수도의 치안이 극도로 악화되자 정부는 서울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고 10개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박 대통령은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경제면에 있어서는 1, 2차 경제개발계획이 성공적으로 추진돼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고 1971년 수출이 10억 달러를 돌파하는 등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베트남전 이후 세계경제가 침체되면서 국내 경기도 냉각됐다. 장기적 인플레이션 속에서 단기자금으로 장기투자를 감행해온 기업들은 은행 부채와 사채의 빚더미를 짊어지고 심각한 경영위기에 빠져 있었다.
미증유의 내우외환에 직면한 박 대통령은 국난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침내 네 가지 정책으로 대응했다.
먼저 비밀리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평양에 보내 북쪽의 사정을 탐지한 다음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해 남북 간의 긴장완화와 경제협력의 길을 텄다.
두 번째로 1972년 11월 국민투표를 실시해 유신헌법을 만들고 그에 따라 정치 통제를 강화했다.
세 번째로 자주국방을 위해 무기 국산화를 촉진하는 율곡(栗谷)계획을 추진했고, 네 번째로 8·3조치를 통해 기업들을 사채의 족쇄에서 해방시켜 중화학공업을 적극적으로 개발 육성하기로 했다.
경제장관들은 항상 정치적 불안을 걱정하면서도 “정치는 내가 맡을 터이니 임자들은 경제개발에 전념하시오”라는 대통령의 말에 힘입어 임기응변의 경제정책을 펴나갔다. 그러면서도 진퇴유곡의 난국에서 박 대통령이 보여준 책임감과 결단력에 탄복하기도 했다.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