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4법 통과후 경제 긴급명령
신고한 사채는 대출금으로 전환
기업 금융비용 3년새 절반으로
미국 출장에서 돌아온 후 천신만고 끝에 단자회사 상호신용금고 신용조합 중소기업신용보증기금 확충에 관한 금융4법을 국회 상임위원회까지는 통과시켰는데 여야 간의 당쟁으로 본회의가 언제 탈선할지 모를 형편이었다. 현오봉 원내총무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늘 밤 본회의에서 통과돼야 한다고 매달렸지만 영문을 모르는 원내총무는 “낙관불허”라며 느긋해하기만 했다.
초조해진 나는 청와대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응원을 청하는 한편 원내대표에게 부탁해 국방부 안건을 뒤로 미루고 금융4법을 의사일정 첫머리로 옮겨 놓았다. 이에 대해 국방부 장관이 항의를 하기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양해해 달라고 간청했다. 다행히 그날 법안은 통과됐고 그 다음 날인 1972년 8월 3일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 명령’이 선포됐다.
청와대와 재무부는 긴장상태에서 사채 신고사항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통령은 비서실장, 김용환 경제특보, 나와 함께한 자리에서 사채 신고액 알아맞히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내가 2000억 원 이상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자 대통령은 3000억 원 이상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신고가 끝난 9일에 집계액이 나왔는데 대통령이 예측한 대로 3456억 원이었다. 나는 예측이 빗나가 무색할 따름이었다.
8·3조치의 주요 내용은 신고사채를 연리 16.5%,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의 대출금으로 전환하고 2000억 원의 특별금융채권을 발행해 조달한 장기 저리자금으로 단기대출의 30%를 장기대출로 전환하게 하는 것 등이다. 금융기관은 신용보증기금을 설치하고 대출금리를 연 19.4%에서 16.5%로 인하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사채의 주식 전환은 일시에 일률적으로 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12월에 시행된 기업공개촉진법에서 그 길을 열었다.
8·3조치가 선포되자 예상했던 대로 기업들은 크게 환영했지만 야당과 일부 언론의 비난은 혹독했다. 마침내 국회에서 긴급조치에 관한 특별위원회가 조직됐고 그 위원회에서 나는 신직수 법무부 장관과 함께 근 한 달 동안 대국회 공방전을 계속했다.
8·3조치 이후 그 효과가 나타났다. 각종 통계에 따르면 기업의 생산비 가운데 금융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1970년 8.8%에서 1973년에 4.4%로 하락했다. 기업 이익률이 평균이자율보다 높아졌고, 자본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이 1971년 39억 원에서 1973년 545억 원으로 비약했다. 실질 국민총생산(GNP) 성장률도 19.8%로 급상승했다.(재무부, ‘재무행정5년사’ 참조)
여담이지만 나는 사채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 같다.
6·25전쟁 중이던 1952년에 나는 부산으로 피란해 미8군 통역관을 하던 중 한국은행 입행 시험에 응시해 수석으로 합격했다. 남들은 5급 8호봉으로 출발했는데 나는 5급 7호봉을 받고 업무부 자금과에 배속됐다. 어느 날 박숙희 부총재가 내 곁으로 오더니 한국의 계와 사채가 얼마나 있는지 추정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 표본조사 같은 것은 전혀 몰랐고, 국세청 과세 자료로 추정해 볼 수 있다는 생각도 전혀 못했다.
‘내가 그 방법을 모르는 것은 배운 것이 없는 탓이다. 공부를 더 하지 않으면 내 앞길이 막힐 것이다.’
이렇게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어느 날 모교인 국민대 은사를 찾아뵙고 청원한 끝에 그 대학 전임강사로 가기로 결심했다. 한국은행에 사표를 내자 인사과장은 신입행원이 한국은행의 중핵 부서인 업무부 자금과에 배속된 뜻을 아느냐고 물으면서 사임을 극구 만류했으나 나는 학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국민대에서 가르치며 배우는 일을 계속하던 중 미국 정부가 외국 교수를 초청해 미국 대학원에서 공부할 기회를 제공하는 ‘스미스-문트(Smith-Mundt) 프로그램’에 응모해 1957년 미국으로 건너가 경제학을 전공하게 됐으니 사채가 내 인생행로를 바꿔 놓은 셈이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