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13>경제개발의 길목에서

  • 입력 2009년 4월 15일 03시 00분


<13>제2금융권개발-증권과 보험

통화 증발-인플레이션 만성화

단기차입→장기투자 해소 위해

장기금융 가능한 증권-보험 개발

그 당시 나뿐 아니라 경제를 아는 사람들은 당시 경제의 기본문제를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었다.

국내 저축이 부족한 가운데 통화 증발(增發)로 투자 자원을 마련하다보니 고도의 인플레이션이 만성화됐다. 기업들은 일반 은행으로부터 단기자금을 빌려 장기투자에 투입한 결과 재무구조가 취약하기 이를 데 없고, 기업을 지탱해 나가자니 병자가 물을 달라고 보채는 것처럼 정부에 언제나 자금 갈증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도 수출과 투자를 위해 관치금융으로 기업들의 요구에 응하다보니 통화 증발과 인플레이션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이런 국면에서 벗어나려면 두 가지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금융에 시장원리를 도입하는 것이고, 둘째는 기업에 장기금융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첫째의 목적을 위해 은행민영화를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이제는 둘째의 목적을 위해 제2금융권 개발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기업이 장기자금을 조달하려면 증권시장에서 주식을 팔아 자본금을 조달하거나 장기 회사채를 발행해야 하는데 당시 증권시장은 그것을 가능케 할 만한 상태에 있지 않았다. 증권시장은 기업의 주식이 아닌 증권금융회사 자체의 주식을 놓고 매매 양측의 책동전(戰)이 계속되는 투기시장에 불과했다.

재무부는 1971년 6월 증권시장 개혁에 착수했다. 실물 거래가 아니라 가(假)매도 가매수의 결제가 가능한 대체거래제도를 폐지하고 실물을 주고받는 결제금융제도를 채택해 투기요소를 제거했다. 그러나 일부 증권사로부터 수차의 행정소송이 제기되고 결제를 거부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러나 나는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고 필요한 조치들을 취해 나갔다. 1973년 2월에는 증권사의 대형화와 현대화를 법제화하기 위해 증권거래법을 개정했고 증권거래소 조직을 회원 공영제로 개편하는 동시에 증권금융회사 자체의 주식 상장을 폐지했다. 그리고 국제금융공사(IFC)로부터 3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 증권금융제도를 정상화했다.

1974년, 4년 11개월의 임기를 마치고 재무부를 떠나게 되자 나를 그렇게 미워하던 증권사들이 증권협회의 감사장을 들고 왔다. 증권시장 개혁으로 증권업계가 망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증권시장의 활성화로 증권사가 살게 됐다는 것이었다.

재무부 직원들은 보험시장을 개발하고 육성하는 데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보험관계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1971년 1월 보험업법을 개정해 보험회사의 자본금을 대폭 인상하고, 건실한 기간산업에 대한 투자를 유도하는 한편 비(非)업무용 부동산투자 등을 금지했다. 보험업을 발전시킴으로써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동시에 보험금으로 장기 투자금융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1973년 2월에 ‘화재로 인한 재해보상과 보험가입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한국화재보험협회가 화재 예방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 계몽, 조사 업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법이 규정하는 특수건물(호텔 시장 극장 백화점 학교 등)에 대해 과학적인 안전점검을 무료로 실시하도록 했다.

한편 1947년에 설립된 고려생명보험주식회사의 부실을 더는 방치할 수 없어 정부 주도로 동해생명보험주식회사를 설립해 고려생명의 보험계약과 전 재산 및 종업원을 동해생명으로 이관하는 조치를 취한 일도 있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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