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의 8·3조치로 기업들은 사채의 중압에서 벗어나 한숨을 돌리게 됐지만 은행의 단기융자로 장기투자를 계속하는 한 재무구조의 악화를 피할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자면 기업들이 증권시장에서 주식 또는 회사채를 상장(上場)해 장기자금을 조달하는 직접금융 제도를 발전시켜야 했다. 그러나 회사의 재무상태를 공개하지 않으면 돈 가진 사람들이 안심하고 주식이나 회사채를 살 수가 없다. 이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는 개인 이외에 각종 재단, 보험회사 등의 기관투자가들이 증권시장에서 주식을 사고파는 주요 주체가 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기관투자가 형성돼 있지 않았다.
주식과 회사채에 대한 수요를 개발하고 기업공개를 촉진하기 위해 재무부는 1972년 8·3조치와 동시에 기업공개촉진법을 제정해 그해 12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는데 이 법은 주식을 상장하는 기업의 재무제표 공개요건을 규정하는 동시에 증권회사, 투자신탁회사, 보험회사, 단자회사 등 기관투자가들이 주식이나 회사채를 매입하는 ‘증권인수단’을 조직하도록 했다. 그리고 재무부 장관은 기업공개심의회의 의결을 거쳐 특정 기업에 기업공개를 명령할 수 있게 하고 공개명령을 받은 기업이 이를 이행하지 않을 때에는 금융지원을 제한하고 세법상의 불이익을 주는 한편 공개한 법인에는 세제 금융상의 특전을 주도록 했다. 이것은 일종의 강압조치인데 직접금융의 경험이 없는 우리 기업들이 기업의 내막을 드러내는 기업공개를 기피하고 은행 융자에만 매달리는 구습을 타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후 기업을 공개해 증권시장에서 장기자금을 조달하는 기업이 늘기는 했으나 증가 속도는 우리가 바랐던 만큼 빠르지 않았다. 당시 주식회사는 1만여 개가 있었으나 1974년 5월 말까지 공개한 기업은 50여 개에 불과했다. 그런가 하면 일부 기업인들이 자기자본은 별로 없이 은행 융자에 의존해 기업을 신설하는 이른바 ‘문어발’식 경영이 사회문제로 부각했고 국회에서도 은행 여신이 소수 가족 중심의 재벌에 편중됐다 하여 논란이 되고 있었다.
기업공개 1974년 50여개社불과
차입 의존 문어발식 경영 문제로
비공개기업 여신 종합관리 나서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개발에 차질이 생길까 우려하면서도 이런 사태를 크게 염려하고 있었다. 결국 그것이 1974년 5·29조치로 나타났는데 전례 없이 내각에 보내는 특별지시의 형식을 취하게 된 것은 대통령의 결단을 강조하고자 했던 청와대 측근들의 발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 지시문의 내용은 공개법인에 대해서는 금융, 외자 도입, 세제 면에서 특별 지원을 하되, 비공개 대기업에 대해서는 여신 납세사항을 종합 관리하고, 은행에서 신규 사업자금을 조달하려 할 때에 주식 공매를 의무화하며, 대주주에 대한 세무관리와 외부감사를 강화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 지시 내용이나 후속 조치는 재무부에서 나온 것인데 재무부는 기업의 건실한 전문적 대형화를 반대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재삼 강조했다. 그리고 기업군을 A, B 2종으로 구분했는데 A종은 부실기업이고 B종은 우량기업이었다. 상식적으로는 A가 우량기업이 되어야 할 텐데 기호 순서를 거꾸로 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부실기업들은 거의 외국 차관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부실기업임을 공개하면 외국의 채권자들이 자금 회수를 서두르게 될 것이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외환위기를 염려해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기호 순서를 거꾸로 하고 A와 B의 기업리스트를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신문들은 재무부가 조치 내용을 은폐하고 있고 A, B 구분 기준이 모호하다며 나에게 비판의 화살을 쏘아댔다. 한편 은행감독원으로 하여금 ‘계열기업군에 대한 여신관리협정’을 체결하게 했는데 그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여신관리 제도의 시발(始發)이었다.
돌이켜보면 금융 민영화, 기업공개, 외부 감사, 경영의 투명화는 선진화로 가는 길이었는데, 그 후 여러 가지 이유로 일관되게 시행하지 못했고 1997년에 외환위기를 당하고 나서야 본격적인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