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공업만으론 수출 증대 한계
대통령 “경제 명운 걸고 추진을”
자금조달 방안 마련 동분서주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대 초기 내우외환에 대한 대응책 가운데 하나로 중화학공업 건설을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었다.
첫째는 미군 7사단의 철수, 베트남전쟁 휴전에 따른 국제정세 변화 등을 고려할 때 자주국방이 필수였다. 이를 위해서는 중무기의 대미 의존을 줄이고 국산화로 가야 하는데 그것은 중화학공업 없이는 불가능했다.
둘째, 더 중요한 것은 경공업만으로는 수출 증대에 한계가 있으므로 이제는 일본처럼 중화학공업으로 이행하는 것이 경제 발전 단계의 당연한 순서라는 생각이었다.
박 대통령은 1973년 1월 12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이른바 ‘중화학공업 선언’을 발표했다. 그 전에 이미 상공부, 청와대 오원철 경제수석비서관 주도 아래 상공부, 과학기술처가 참여하는 중화학공업 개발계획 입안이 진행되고 있었다. 뒷날 보고된 개발계획은 철강, 비철금속, 조선, 전자, 화학 등 6개 분야의 생산시설을 건설한다는 매우 야심찬 내용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자금조달 방안에 관해서는 관계부처와 협의가 전혀 없었다. 대통령이 그들의 실물 계획을 재가하면 재무부는 어쩔 수 없이 대책을 마련하겠지 하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재무부는 언제나 ‘노(NO)’부터 하는 부처니까 입안단계에 참여시키면 될 일도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중화학공업 계획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나는 중화학공업 개발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어떻게 조달하느냐가 문제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은 나의 ‘반론’이 크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는 나를 집무실로 불러서 타이르듯이 말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나라와 민족의 명운을 걸고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하다가 패망했다. 그러나 일본은 다시 일어나서 지금은 세계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는데 그 배후에는 중화학공업 건설이 있다. 나는 지금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거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 경제의 명운을 걸고 중화학공업을 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어 “장관!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일을 해 봅시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알겠습니다. 자금계획을 만들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청와대를 나왔다.
나 자신도 중화학공업에 부정적인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았다. 당시 장예준 상공부 장관은 신발이나 섬유 같은 노동집약적 경공업제품은 얼마 가지 않아 후발 개발도상국들에 비교우위를 잃게 될 것이므로 중화학공업의 개발이 시급하다고 보고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대구의 섬유업계는 상공부 장관이 섬유산업을 경시한다고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장 장관의 견해가 백번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 건설에 따르는 문제점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먼저 시장 확보가 문제라고 생각됐다. 일본은 인구가 1억3000만 명에 가까워 국내 잠재시장이 크기 때문에 국내 시장을 통해 중화학 제품의 품질을 테스트한 다음 해외시장으로 진출하는 전략을 써서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인구가 3000만 명밖에 되지 않는 우리나라는 내수 시장이 작고 처음부터 수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하기야 우리 기업들의 수출 능력으로 미뤄보면 될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은 필요한 내자와 외자를 조달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