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중 1970년 봄에 또다시 심한 가뭄이 왔다. 박 대통령은 4월 22일 가뭄피해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지방장관회의를 소집했다.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대책을 결의한 다음, “해마다 되풀이되는 이 재난을 당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근본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 방법으로 농촌재건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했다. 이것이 새마을운동의 시발(始發)이다. 처음에는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 했는데 점차 ‘새마을운동’으로 이름이 통일됐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1971∼1984년 새마을운동에 투입된 자금은 총 7조2000억 원으로 연평균 5177억 원이었다. 총액의 57%는 정부 투자, 11%는 주민 부담, 나머지 32%는 새마을성금 같은 민간단체의 찬조금으로 이뤄졌다.
용도별 투자 명세를 보면 소득 증대 42.8%, 환경 개선 27.5%, 생산기반 확충 22.2%, 정신 계발 2.8%, 도시 및 공장 새마을운동 4.7% 등으로 돼 있다. 정부 투자는 같은 기간 정부 세출(歲出) 총액의 약 4%에 해당하는데 이것을 매개로 해 거의 같은 액수의 민간 자금을 동원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새마을운동이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킬 줄은 미처 몰랐다.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배우기 위해 중국은 물론 베트남 필리핀 러시아 콩고민주공화국 몽골을 비롯해 133개국에서 4만여 명이 방한해 새마을운동을 시찰했다는 기록이 있다.
내 집무실을 찾아오는 개발도상국 귀빈들은 거의 예외 없이 새마을운동에 관한 질문을 했고 나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자료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외국에 나가 한국 경제발전 경험을 이야기할 때에도 새마을운동을 빼놓을 수 없었다. 나는 외국인들에게 새마을운동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줬다.
가난을 숙명으로 여겨 ‘빈곤 악순환’
1970년 대통령 “농촌재건운동” 제의
中-베트남 등 133개국 4만명 시찰
첫째, 농촌 개발에는 주민들의 정신 교육이 필수이다. 한국은 처음부터 자조, 근면, 협동의 전통적 가치를 가르치고, 하면 된다는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둘째, 농민들의 자발적 노력을 환기하자면 초기에는 정부 주도와 재정 원조가 필수이다. 그러나 소액이라도 농민 자체가 부담하는 부분이 있게 해 자조의 정신을 배양했다.
셋째, 농민들의 자발적 노력을 유도하기 위해 유인(誘因)과 경쟁이라는 두 가지 지렛대를 사용했다. 따라서 정부 지원은 자조 노력을 전제로 했다.
넷째, 농민에게 가시적 이익을 가져오는 사업부터 시작해 농민들의 자발적 참가와 협동을 유도했다. 그 다음 농민의 관심이 많은 사업을 우선적으로 시행하도록 지도했다.
다섯째, 정부의 농업 개발사업과 새마을사업을 연계해 양자가 상승 효과를 발휘하도록 배려했다.
여섯째, 농민들의 협동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모든 문제를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하도록 지도했다. 박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이 민주주의의 도량(道場)이 되게 하라고 여러 번 지시했다.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