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 경제장관 포함 11부 개각
경질 20일만에 다시 靑경제특보로
부가가치세법은 1976년 12월 국회를 통과했고 1977년 7월에 시행됐다. 예상대로 부가가치세에 대한 반발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영수증을 주고받자면 우선 금전 등록기를 비치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감췄던 세원이 드러나 납세액이 증가하고 비자금 마련도 어렵게 되니 기업에는 매우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영수증을 주고받는 것을 야박한 것처럼 생각하는 문화 속에서 영세상인들의 아우성이 들끓었다. 그들은 모두가 투표권자들인데 납세액은 얼마 되지 않지만 납세자의 수로 따지면 전체의 80∼90%를 차지한다.
여론이 악화되고 정부 내에서조차 물가 상승 요인이 된다며 시기상조론을 내세우는 장관도 있었다. 더욱이 다음 해인 1978년 7월에는 제9대 대통령 선거, 12월에는 제10대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돼 있었으므로 정부와 여당은 여론에 극도로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박정희 대통령은 1977년 6월 관계 장관들을 소집해 부가가치세 실시를 놓고 의견을 물었다. 난상토론이 있었으나 박 대통령은 세율을 10%로 결정하고 7월 시행을 재확인하는 결단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이날 회의는 부가가치세의 운명을 결정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러나 1978년 12월 12일 시행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여당인 공화당은 68석, 야당인 신민당은 61석, 통일당이 3석, 무소속이 22석을 차지하게 됐으니 사상 최초로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가 된 것이다. 경악한 공화당은 선거의 패인을 부가가치세와 물가상승이라고 주장하고 그 책임을 경제팀에 돌렸다.
사태의 심각성에 충격을 받은 박 대통령은 12월 23일, 11부 장관을 경질하는 개각을 단행했다. 그에 따라 경제장관 대부분이 경질됐고 경제통인 청와대 김정렴 비서실장도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부가가치세는 살고 그를 탄생시킨 경제각료들은 물러나게 되었는데, 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떠나게 됐으니 별로 아쉬울 것도 없다고 자위했다.
퇴임 인사를 하러 청와대로 들어가 대통령에게 나의 불민(不敏)을 사과하자 대통령은 봉투 하나를 책상 위에 내밀며 의외의 말씀을 했다.
“그놈의 정치를 하자니 별수가 없지 않소. 그동안 수고가 많았는데 한 두어 달 쉬게 할 터이니 그동안에 지방을 돌아보고 그 실상을 나에게 보고해 주세요.”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고 다만 그의 수심 어린 얼굴을 보고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한편 지칠 대로 지친 나로서는 큰 짐을 벗게 됐으니 홀가분하고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 명령에 따라 지방경제를 살피기 위한 계획을 생각하면서 한가하게 연말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는데 신년 초인 1월 12일 청와대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경제담당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됐으니 곧 들어와서 임명장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10년간의 공직에서 해방되었다 싶었더니 20일 만에 나는 또다시 공직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