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8월 노태우 정부 때 중국과의 수교가 이뤄졌지만 그 이전에도 우리 무역업계는 홍콩을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과 무역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79년 이건중 조달청장이 정부 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의 관영 무역회사와 직접 무역 거래를 한 일이 있다.
그때 고추의 흉작으로 고추 파동이 일어나자 조달청은 급히 멕시코와 인도로부터 고추를 수입해 서울 시민에게 공급했는데 멕시코와 인도의 고추는 맛이 없다 하여 국산 고추 값은 계속 오르고 서울 어느 동네에서는 고추장 절도 사건이 일어났다는 신문 보도가 나기도 했다. 이 청장은 중국 고추를 수입할 길이 없나 하여 국내의 무역업체를 탐색한 결과 중국 관영 무역상사와 잘 통하는 무역업체를 알게 돼 중국 고추를 수입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한국과 수교가 없는 적성(敵性)국가이므로 중국과의 무역거래는 위법이고, 하물며 정부 기관이 중국 고추를 수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청장은 재무부에서 증권·보험국장을 지내다가 조달청장으로 영전했고 나와는 가까운 사이였기에 어느 날 청와대 특보실로 나를 찾아와 고충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전부터 중국과의 무역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1978년 개혁, 개방의 방향으로 노선 전환을 선언했는데 그들의 새로운 외교 전략은 네 가지로 구성돼 있었다.
첫째, 양호한 주변 환경을 유지해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둘째, 주변국으로부터의 위협을 감소시켜 안보 역량을 강대국에 집중한다. 셋째,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해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넷째, 영토 문제와 과거사 문제를 해결해 주변 국가들과의 상호 신뢰를 구축한다는 것이었다. 이중에서 첫 번째와 네 번째 외교 전략은 나에게는 마치 한국을 염두에 두고 쓴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중국은 한국과의 비공식 무역을 묵인하는 것이 아닐까? 중국이 크게 부상하고 있는데 이 거대한 수출시장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중에 이 청장이 문제를 들고 온 것이다.
이 청장은 대통령의 승인을 얻어 중국 고추를 들여오고 싶다고 말했다. 이야기 끝에 고추보다 이 기회에 중국과의 교역을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말이 나왔다. 두 사람은 중국보다 크게 앞선 우리 공업제품을 중국에 선전할 겸, 고추를 사러 가는 배에 포니자동차 한 대와 섬유류, 가전제품들을 싣고 가서 팔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 배가 톈진(天津) 항에 들어갈 때 태극기를 달고 들어 갈 수 있도록 교섭하기로 했다. 나는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해 재가를 받았다. 이 청장은 홍콩과 방콕을 왔다 갔다 하면서 중국 측 관영 무역회사와 교섭을 계속한 끝에 배를 보내도 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필경 중국 정부 계통의 승인을 받아냈던 모양이었다. 조달청이 고용한 우리 배는 위에서 말한 물건들을 가득 싣고 태극기를 휘날리고 톈진 항에 입항했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싣고 간 물건들을 중국 회사에 팔아넘기고 고추를 실은 우리 배는 무사히 돌아왔다.
그러나 이 일이 알려지자 중앙정보부는 자기들이 해야 할 공작을 이 청장이 했다고 하여 그를 오라 가라 했고, 이 청장은 심한 고초를 겪었던 모양이다. 대통령의 특명사항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조용해지기는 했지만 나는 그에게 미안한 생각을 금치 못했다. 그 후 이 청장은 신병으로 젊은 나이에 별세했는데 그와 같이 성실하고 유능한 인재를 잃게 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