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경제특보를 사임하고 실로 10년 만에 민간인으로 돌아왔는데 어차피 나는 경제학으로 먹고살 수밖에 없는 몸이었다. 1980년 초 어느 날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김만제 원장이 당분간 객원연구원으로 KDI에 와서 책이라도 읽는 것이 어떠냐고 묻기에 고맙게 받아들였다. 마침 KDI에 나가 알아볼 문제도 있었다. 금본위제(金本位制)에 관한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돈의 가치를 안정시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경제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물가가 상승하면 돈의 가치가 떨어지고 물가가 하락하면 돈의 가치가 올라가므로 돈의 가치를 안정시킨다는 것은 물가를 안정시킨다는 말과 같다. 그 방법으로 19세기에는 영국을 중심으로 금본위제도를 채택하는 나라가 많았다. 금본위제란 돈의 가치를 금의 가치와 연계시키는 제도다. 예컨대 ‘순금 1온스=100달러’로 정해 놓고 금융기관이나 개인은 중앙은행에 이 환율로 금을 팔기도 하고 사기도 한다. 중앙은행은 경기 대책으로 통화량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 금을 사들이고 반대로 물가상승이 우려되면 금을 팔아 통화를 회수한다.
그러나 이 제도는 통화 공급을 중앙은행의 금 보유량에 연계시킴으로써 통화의 과다 증발을 예방하는 이점이 있는 반면에 불황 시에는 금 보유량에 따른 제약 때문에 통화량을 충분히 늘리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금본위제를 채택했다 폐지했다 하는 시행착오가 반복됐다. 1971년 미국이 최종적으로 금과 달러의 연계를 단절했고, 1978년 국제통화기금(IMF)은 금과 전혀 관계가 없는 ‘관리통화제도’를 국제통화기구에서 채택하는 것으로 IMF 헌장을 개정했다. 그에 따라 IMF는 보유하던 금의 6분의 1을 자유시장에서 처분하고 다른 6분의 1은 회원국 정부에 돌려줬다.
그런데 1980년 초 미국에서 금본위제 복귀론이 대두했다. 1970년대의 고도 인플레이션과 고금리에 시달린 국민이 정부의 통화정책을 신뢰하지 않게 돼 무절제한 통화관리를 견제하는 자동장치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제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1981년 9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금본위제 복귀 가능성을 연구 보고하게 하기 위해 17인위원회를 구성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점이 궁금했던 차에 KDI에 나가기로 했으므로 이 문제를 연구하기로 했다. 나의 연구결과는 3년 후인 1983년 8월, 뉴욕의 세계문제연구원(GAI)이 제네바에서 주최한 국제회의에서 ‘금본위제 복귀? 세계 무역과 금융에 던지는 의미’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는데 결론은 금본위제로의 복귀는 바람직하지도 않고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KDI에서 소일하고 있을 때 친구인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의 조이제 박사로부터 이 센터의 객원연구원으로 오라는 초청을 받게 되었다. 출국을 위해 외무부에서 여권을 발급 받았는데 직업란을 보니 ‘연구보조원(Research Assistant)’이라고 적혀 있었다. 실무자가 ‘Visiting Fellow’라는 용어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피해서 외무부 차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매우 죄송하다며 여권을 보내 달라고 했다. 사람을 보냈더니 고쳐주기는 했는데 원래의 글을 긁고 그 위에 타이프로 친 것이라 위조 여권으로 의심 받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여튼 그 여권을 가지고 5월 17일 출국했다. 그 다음 날 일본 도쿄(東京)에서 TV를 보니 5·18민주화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울한 마음으로 하와이로 떠났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