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48>경제개발의 길목에서

  • 입력 2009년 5월 26일 02시 56분


<48>국무총리로 정부에 복귀
전두환 국보위장 “만나자” 전갈
면담후 얼마 안돼 총리로 임명
1980년 흉작 우려 美와 쌀교섭

하와이에 있는 동안 가족을 서울에 두고 왔기 때문에 연구밖에 할 일이 없었다.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남아서 ‘아태지역의 무역 패턴과 무역정책 변화의 추세’라는 논문을 쓰고 있었다. 3개월의 노력으로 논문 초고가 거의 완성되고 인용 문헌과 통계의 각주를 다는 일만 남았는데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이승윤 재무부 장관의 전화인데 국제금융사정이 좋지 않으니 미국의 아는 사람들을 만나서 협조를 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지’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서울에 와서 이 장관을 만났는데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이 나를 만나자고 한다는 전갈이 왔다. 무슨 일인가 하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을 찾아갔다. 전 위원장은 어쩌다가 중책을 맡게 되었다는 말을 하고 경제에 대해 이것저것을 물어 보는 것이었다. 나는 아는 대로 대답을 하고 정치문제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과도기의 혼란을 극소화하기 위해 계획적이고 질서 있는 민주화 계획을 발표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전 위원장이 “지금 한 말을 나의 비서관에게 다시 한 번 말해 달라”고 하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그 자리를 물러 나왔다. 그날 저녁 나의 집으로 찾아온 비서관은 허문도 씨였다.

이제 용건이 끝난 것으로 알고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하와이로 돌아갔다. 그러나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나 8월 말경에 또다시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유학성 중앙정보부장의 전화였다. 정보부장은 8월 말까지 꼭 돌아오라고 당부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오시면 알 것이니 꼭 오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나에게 무엇인가 조사할 것이 있어서 그러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었으나 오라고 하니 안 갈 수도 없어서 미완성의 논문 원고를 맡겨두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알고 있던 서정화 씨(다음 날 내무부 장관이 된다)가 지프로 비행기 승강대까지 달려오더니 나를 태우고 시내로 질주하는 것이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축하합니다. 내일 국무총리가 되실 겁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또다시 나의 의사와 관계없이 정부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다음 날 전 대통령은 나에게 사령장을 주고 나서 소파에 앉자 “또다시 어쩌다가 중책을 맡게 되었으니 잘해보자”고 한 다음 그동안 나의 재산 상태를 세밀하게 조사해 보았다는 말도 했다. 그러고 보니 나를 처음 만났을 때는 아무 말도 없다가 일주일 후에 다시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과도기를 넘기면 곧 사임할 것이니 양해해 달라고 진언했다. 구시대의 인물이 새 정부에 남아 있으면 폐가 된다는 말도 했다.

총리가 되고 보니 우선 금년에 흉작이 된다는데 식량 사정은 어떠한지 궁금했다. 신병현 부총리에게 PL 480(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계획)을 교섭할 필요가 없는지 농림부에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쌀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회답이 오자 나는 곧바로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교섭에 들어갔다. 늦으면 쌀 파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안보 정세를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전국 11개 도시에서 안보정세보고회를 갖도록 지시했다. 나는 9월 27일 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광주로 갔다. 20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5·18민주화운동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무슨 말로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정부와 국민이 여러분의 아픔을 나누고 어루만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인사말을 했다. 청중 가운데 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도 울고 싶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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