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나의 내각은 강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대통령이 선택한 사람들이지만 모두가 식견과 경험을 겸비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경제팀으로는 신병현 부총리와 이승윤 재무부 장관, 서석준 상공부 장관, 박봉환 동력자원부 장관, 김주남 건설부 장관, 고건 농수산부 장관 등 모두가 실력 있고 나와 친숙한 사람들이었다. 신 부총리는 경제 안정을 중시하는 사람이었고, 이 장관은 우리나라에 현대금융이론을 도입한 학자다. 게다가 김재익이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배치되었으니 경제정책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됐다. 다만 신 부총리가 정책 조정에 힘들어하는 것을 볼 때마다 관계장관들을 오찬에 초대해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결론을 내곤 했다.
당시 경제 상태는 1979년부터 재연된 석유파동과 10·26사태로 인한 사회 불안이 겹쳐 높은 물가, 국제수지 악화, 성장 둔화의 3중고(苦)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신 부총리는 1980년 9월 16일 ‘경제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금리 2% 인하, 양도 소득세율 하향조정, 달러당 수출금융 지원단가 15원 인상 등의 재래식 처방이 포함됐지만 그가 제시한 경제운영의 기본방향은 명백히 방향 전환을 예고하고 있었다. 즉 안정, 능률, 개방, 경쟁, 민간 주도 등을 내세우고 있었고 여기에는 물가 안정을 최우선시하는 대통령과 그를 보좌하는 김재익의 철학이 반영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9·16 조치에도 불구하고 경제는 호전되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신 부총리는 같은 해 11월 8일에 다시 ‘수요 진작을 위한 경기 활성화 대책’을 발표해 예금금리와 대출금리를 끌어내리고 건전 기업에 대한 자금지원을 실시하기로 했다. 소비금융을 확대하고 에너지 절약 사업을 지원하며 TV, 소형 자동차 등에 대한 특별소비세를 인하하는 내용도 담았다. 기업의 재무구조개선을 지원하기 위해 토지개발공사가 토지채권을 발행하여 비업무용 부동산을 매입할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1981년 6월 26일에는 다시 ‘주택경기 활성화 조치’를 발표해 양도소득세를 완화하고, 국세청이 지정·고시하고 있는 특정지역을 해제하기로 했다. 또 자금출처 조사는 가급적 배제하고 서민주택 공급 자금을 확대하기로 했다. 그리고 1981년 말에는 ‘인구증가 억제 대책’을 발표해 가족계획을 장려하고 소(少)자녀 가족에 대한 지원 시책을 강화한다 했는데 지금에 와서 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있다.
1981년의 주요 개혁 사업으로는 4월에 종래의 ‘공정거래와 물가안정에 관한 법률’을 대신하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공정거래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모든 예산 지출을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하는 이른바 ‘제로베이스 예산 시스템’이라는 예산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1981년 하반기에 들어서서 석유 및 수입 원자재 가격이 안정되고 정부의 경기 활성화 정책이 주효해 경제 성장률은 전년의 ―4.8%에서 6.6%로 반등했다.
나는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국무총리 사령장을 받을 때 과도기를 넘기면 사임하겠다고 진언했었다. 나의 말을 지키기 위해 연말 국회에서 예산을 통과시킨 다음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대통령은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만류했지만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나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을 생각하게 된다고 하니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1982년 1월 3일 개각이 단행되었는데 나 때문에 이승윤 재무부 장관과 박봉환 동자부 장관 등 다른 장관들이 함께 사임하게 된 것은 미안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전 대통령은 1월 16일 나를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