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1월 국무총리를 사임한 지 2주 만에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임명됐다. 이 회의의 의장은 최규하 전 대통령이고 위원에는 허정 유진오 윤치영 백낙준 유달영 씨 등 당대의 저명한 원로들이 포함돼 있었다. 회의 안건은 주로 대북정책과 경제정책에 관한 것이고 회의에는 국무총리 이하 관계 장관들이 출석했다. 회의 결과는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이 회의에 참석하는 일 등으로 소일하고 있던 중 1983년 11월 이른바 ‘낙하산 인사’로 한국무역협회 회장으로 가게 됐다. 지난 10년 동안 화폐경제를 다루는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을 경험했으나 실물경제를 다루는 상공부를 경험하지 못했는데 이제 통상업무를 경험하게 되었으니 해볼 만한 자리라고 느껴졌다.
무역협회 회장에 취임하자 동서문화센터에서 일할 때 사용하던 데스크 컴퓨터를 회장실로 들여왔다. 케이프로라는 문서작성기인데 아주 투박하고 무거운, IBM 컴퓨터가 나오기 이전의 기종이었다. 직원들은 신기한 눈으로 이 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역협회에는 일찍부터 전산부가 있어서 주로 무역통계를 작성하는 일을 해 왔다. 나는 사무자동화를 위해 컴퓨터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연차적으로 각 과에 컴퓨터를 배치하도록 지시했다. 사무자동화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해 IBM 멀티스테이션 5550 26대를 설치하고 각 부서 직원들과 임원들에게 교육을 실시했다. 정보화시대에 대비하여 한국무역협회 무역통계(KOTIS)의 데이터베이스를 확충했는데 당시의 KOTIS와 오늘의 한국무역정보통신(KT-NET)을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있고 그동안 관계 직원들의 노고가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1991년에 KT-NET이 설립돼 무역업계의 전산화시대를 열게 됐고 관세청과 연계하여 복잡다기한 관세환급 절차를 컴퓨터로 처리하게 됐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으로부터 들은 말인데 이러한 전산화로 수십억 원의 비용이 절감되었다고 한다.
무역협회는 세계 주요 도시의 무역센터를 조직화한 세계무역센터협회(WTCA)의 회원이다. 처음으로 연차 총회에 나가 보니 회원들 중에는 부동산 개발업자가 많았고 이탈리아 출신의 가이 토졸리 회장이 장기집권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사회 멤버로 선출돼 WTCA의 운영에 관여하게 됐다. 토졸리 회장은 WTCA는 무역의 유엔이라고 자랑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것과 거리가 먼 상태였다. 세계무역의 유엔이라고 하면 적어도 세계무역 동향을 감시하고 보호주의에 대한 방침을 밝히는 등 공적 기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전혀 볼 수 없었다. 나는 이사회에서 이 약점을 지적하고 정책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했다. 그때부터 보호주의를 반대하는 총회 결의문을 각국 정부에 발송하는가 하면 스위스 제네바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본부와 협조관계를 맺기도 했다.
무역센터 자체에 대해서는 배울 것이 많았다. 세계의 대표적인 무역센터에는 오피스, 전시장, 회의실, 통신시설, 연수원, 쇼핑센터, 호텔 등이 한자리에 모여 있어서 무역관계자들에게 최고의 편익을 제공하고 있었다. 대만이 대규모 무역센터를 건설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 ‘수출입국’의 나라 한국에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초라한 전시장과 중구 회현동의 무역회관이 무역센터의 전부였다. 나는 새로운 무역센터의 건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