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회 임원진과 직원이 일체가 되어 공사에 매달린 결과 공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드디어 88올림픽 개막식 10일 전인 9월 7일, 200여 명의 무역협회 회원 및 내외의 귀빈이 참석하고 노태우 대통령이 임석한 가운데 개관식이 성대하게 거행됐다. 이제 한국무역센터는 국내외 무역업체에 필요한 모든 서비스와 편익을 제공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게 됐고 무역한국의 상징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무역센터로 부상하게 됐다.
생각해 보면 한국의 고도성장을 이끈 것은 수출이었고 수출의 기관차 역할을 한 것은 누가 무어라 해도 박정희 대통령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공사가 최종 단계에 이르렀을 때, 어디엔가 박 대통령 동상을 건립할 자리를 물색해 보라고 건설본부에 지시했다. 건설본부장은 지금의 트레이드타워 입구 오른쪽에 한 자리가 있다고 도면을 그려 왔다. 그러나 학생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끌어 내리는 판국이니 지금은 동상을 세울 때가 아니라고 다시 생각했다. 하지만 후세에 언제인가는 박 대통령을 평가할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트레이드타워 엘리베이터 타는 자리 서쪽 끝 벽에 오목하게 들어간 곡선 공간을 만들어 그곳에 박 대통령의 흉상이 들어갈 수 있도록 공사를 마무리했다. 언제인가는 무역협회가 나의 소원을 실현해 주기 바란다.
무역센터의 건설을 위해 희생적 노력을 아끼지 않은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 건설위원회는 박용학 대농 회장, 나익진 동아무역 사장, 남상수 남영산업 회장, 이윤채 유림통상 사장, 이종국 남양사 회장, 문병혁 동화산업 사장, 이유복 YB리상사 사장, 박승순 선창산업 사장, 한봉수 무역진흥공사 사장, 이선기 무역협회 상임부회장, 그리고 노진식 전무 등 위원장인 나를 포함하여 12명으로 구성됐다. 기업주 회원들은 기업 경영에 영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일같이 건설 업무를 돌봐주었고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합리적인 해결책을 이끌어 냈다. 협회 집행부 측에서는 이선기 부회장, 노진식 건설본부장, 그리고 성기영 기술본부장의 노고를 잊을 수 없다. 특히 노진식 건설본부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 추진에 몰두했고, 외부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해결을 위해 뛰어다녔다. 그 후 임기 만료 후 공항터미널 사장, 한국무역정보통신(KT-NET) 사장으로 활약했는데 불행하게도 1998년 10월에 교통사고로 타계했다. 정말로 아까운 인재였다. 나는 그의 비문을 썼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엇인가 큰일을 하면 반드시 반대와 비난의 소리가 있게 마련이다. 무역센터 건설의 경우에도 무역특계자금을 직접적인 무역진흥 용도에 쓰지 않고 간접적인 무역센터 건설에 썼다고 하여 비판하는 소리가 있었다. 국회에서도 이 문제를 거론하여 나를 소환한 일도 있었다. 국회에 나가 해명을 하고 끝났지만, 무역특계자금에 대해서는 그전부터도 국회와 언론의 논란이 있어 수차에 걸쳐 징수율을 0.075%까지 낮추게 되었는데 나는 장차 이 자금은 없어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이 자금이 없어지면 회원 회비만으로는 종전부터 해오던 무역진흥 서비스를 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무역센터를 건립함으로써 이제는 임대수입과 기타 출자수입으로 무역협회의 재정 기반이 튼튼해졌고 무역특계자금이 없더라도 수출 지원 업무를 계속 또는 확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로 1996년에 특계자금은 없어졌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