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라운드 지지” 민간 외교
“농업은 공산품과 달라야” 주장도
‘1985년의 국제적 인물’ 선정 영예
오늘은 국제무역 질서의 변천과 우리의 수입 개방 과정을 간략히 회고하기로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이 창설되고 국제협력 기운이 충만할 때 무역을 자유화하여 1930년대 이래의 보호무역 후유증을 제거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46년 23개국이 제1차 협상을 벌여 4만5000개의 관세 양허(讓許)에 합의했고 1948년에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을 발족시켰다. 한국은 1967년 4월 1일부터 GATT의 정회원이 됐다.
보다 본격적인 무역 개방을 위해 1973∼79년에 102개국이 참가하는 도쿄(東京)라운드가 진행됐다. 그 결과 9개 선진국은 관세율의 3분의 1을 인하했고, 공산품의 세계 관세율 평균치는 GATT 창설 당시의 40%에서 4.7%로 인하하기로 합의했다. 이러한 국제 동향에 발맞춰 우리나라도 1978년 2월 수입자유화 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5월부터 자유화 조치를 시작했다. 같은 해 9월에 제2차, 12월에 제3차 자유화 조치를 취함에 따라 수입자유화율이 1978년 상반기 54%에서 하반기에 68.6%로 높아졌다.
1982년 1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된 GATT 각료회의가 새로운 GATT 협상을 시도했지만 농업 개방 문제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주요국들은 4년간의 물밑 협상 끝에 1986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 합의했고 그 후 7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1994년 4월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125개국 정부가 합의문에 서명했다. 특기할 것은 이 협정에 따라 세계무역기구(WTO)가 설립됐다는 것이다.
나는 이 당시 무역협회 회장으로서 민간 외교의 일익을 담당하여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을 지지했다. 그러나 1986년 1월 열린 다보스포럼에서는 농업은 경제적 타산을 초월하는 전통적 생활양식의 문제이므로 공산품과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GATT의 아르투르 둥켈 사무총장은 무역 자유화에서 가장 이득을 많이 보는 한국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반론했다.
1988년 1월 8일 인도네시아 발리의 누사두아비치호텔에서 인도네시아의 무역정책연구소(TPRC)와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공동 주최하는 제4차 아시아 태평양지역 무역회의가 개최됐다. 16개국 대표와 유럽공동체(EC) 대표, GATT 사무국이 참가하는 이 회의에서 나는 대회 의장과 사회를 맡게 돼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의 진전 상황을 검토하고 쟁점을 부각시키는 한편 협력과 타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89년 4월 도쿄에서 개최된 슈미트위원회 회의에서는 세계경제의 당면 문제와 특히 후진국 채무 누증, 선진국 원조 문제가 논의됐다. 나는 후진국을 원조하는 최선의 방법은 선진국이 후진국의 물건을 사주는 것이라고 발언했다. 회의 내용과 정책 제안은 ‘하나의 세계를 향하여(Facing One World)’라는 책자로 발간됐고, 이 책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이 관세장벽 및 비관세장벽을 철폐하라는 주장이 들어있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의 추세에 따라 우리나라는 1980년대에 적극적인 자유화 정책을 추진했다. 1986년부터 경상수지가 흑자로 전환하였고 1987년에는 수입자유화율이 91.5%에 이르렀다. 1988년 이후부터는 일부 농산물 수산물 광산물 등을 제외하고 공산품은 완전히 자유화됐다. 1994년에는 농산물의 자유화율도 90% 이상이 됐고 전체 자유화율은 98.5%로 높아졌다.
1985년 8월 23일 나는 미국 백악관으로부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서명한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샌타바버라에서 열린 세계무역엑스포에서 내가 무역 자유화를 통한 무역의 성장 발전에 기여했음을 인정하여 ‘올해의 국제적 인물(International Man of the Year)’로 선정되었음을 축하한다는 편지였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