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진통에 구조개혁 발목잡혀
한보사태로 정경유착 실상 드러나
외국채권자 한국에 대한 신뢰 흔들
1990년대 전반기는 무역과 자본의 자유화가 세계경제의 주요 화두였다. 교통, 통신 기술의 혁명적 발달로 국경의 의미가 희미해지는 가운데 선진국들은 1980년대의 보호주의가 결국 자기들 자신에 대한 족쇄임을 절감하게 됐고 그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한때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유럽경제지역(EEA),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등으로 지역단위의 무역자유화를 추진하다가 결국에는 세계 무역질서를 재건해야 한다는 각성이 높아져갔다. 그 결과 1994년, 종래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체제를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로 개편하여 세계적 차원의 무역 자유화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한편 수입개방에 따라 선진국의 제조업은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의 값싼 제품과 경쟁할 수 없게 되자 서비스와 자본 수출로 눈을 돌리고 후진국에 서비스 산업과 자본거래의 자유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개혁 개방 정책으로 전환하여 경제개발에 선진국의 자본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국제정세는 바야흐로 개방화와 세계화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1997넌 11월 외환위기기 발생했다. 왜 그랬을까? 나는 ‘IMF 사태의 원인과 대책’이라는 논문에서 그 원인을 상세히 설명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민주화, 세계화의 역사적 추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고, 개혁 개방의 후유증으로 발생한 동남아시아국가들의 외환위기가 우리에게 파급됐다는 것이다. 오늘은 민주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회고해 보기로 한다.
우리는 1987년 노태우 대통령후보의 6·29 선언을 기점으로 민주화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 경제는 이른바 ‘4고(高) 3저(低)’ 즉 고임금, 고금리, 고지가, 고물가와 저기술, 저능률, 저부가가치라는 난제를 안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자면 전면적 구조개혁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격렬한 노사분규, 부동산 투기, 집단 이기주의가 민간과 정부의 투자와 구조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수출은 미국 경기의 회복과 일본의 엔고(高), 중국 특수 덕분으로 1995년에는 1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그러나 수입이 거의 완전히 개방된 상태에서 지가상승으로 벼락부자가 된 졸부들의 수입수요가 급증하여 1996년에는 사상 최대의 경상적자(237억 달러)를 기록했다.
문민정부는 세계화의 구호를 내세웠으나 그에 대응하는 구체적 시책을 일관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다. 오히려 구 중앙청 건물 철거, 외인아파트 철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월드컵 유치,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유치 등으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짐을 자랑했다. 경제 침체로 여론이 악화되면 경제각료를 경질하여 국면전환을 시도해 문민정부 5년 동안 경제 부총리가 일곱 번이나 경질됐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부정부패 청산이 정치 일정으로 등장하여 그 과정에서 전직 두 대통령이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 한보그룹 부도를 계기로 정경유착의 연결 고리가 백일하에 드러나 은행장, 국회의원 등 공직자와 재벌 총수들이 줄줄이 법정에 서게 됐고 현직 대통령의 아들마저 교도소에 수감됐다. 국민들의 실망은 고사하고 국제 금융계에 비친 한국의 이미지가 어떠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정치 드라마의 충격으로 잘못하면 철창신세를 지게 된다는 것을 실감한 금융기관장들은 불황 국면에서 기업들이 가뜩이나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는 때에 여신 업무를 조이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자금력이 약한 중소기업과 기업 집단들이 먼저 부도를 냈고 드디어 기아그룹이 그 뒤를 따르게 된다. 경제 분위기가 급속도로 악화되고 외국 채권자들의 한국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