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서 민주화, 세계화의 과정에서 불가피한 구조개혁이 늦어지고 있음을 보았는데 우리나라 외환위기의 기폭제가 된 것은 아시아의 금융위기였다. 당시 태국 인도네시아가 개혁 개방의 여파로 금융위기에 봉착했고 그것이 홍콩 싱가포르 은행들에 파급되는가 하면 심지어 일본에서도 잇따른 은행 파탄이 일어났다. 이렇게 되니 외국의 금융기관과 투자가들이 ‘과연 한국이 예외가 될 수 있을까’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정보시대에는 국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순간적으로 세계 금융시장에 전파된다. 국제수지 악화로 1996년 환율이 상승세로 돌아서자 외국인 투자가들은 투자 수익의 환차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됐고, 위에서 본 정치 드라마와 정경유착, 금융 비리로 한국 금융의 치부가 드러나자 한국에 여러 가지 의문을 품게 됐다.
국제수지가 만성적으로 적자이고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해외 단기 차입에 열중했는데 과연 대외지급에 문제는 없는 것일까?
대기업들의 차입에 의한 자동차, 제철, 석유화학 등에 대한 중복 투자가 과연 경쟁력이 있는 것일까?
기업 집단들이 잇따라 도산하는데 한국 금융기관들의 부실 채권은 얼마나 될까?
재벌들이 정치권에 바친 수백억 원의 비자금은 재무제표 어디에 숨겨져 있는 것일까?
한국 금융업체나 기업의 분식결산과 재무제표를 믿을 수 있는 것일까?
현 정부는 지금의 위기를 관리할 능력이 있는 것일까?
드디어 외국 채권자들은 한국으로부터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주식을 투매하자 주가가 폭락했다. 일시에 자금을 회수하니 환율이 폭등하고 외환보유액은 바닥이 났다. 금융 파탄이 온 것이다.
정부는 금융안정화대책을 발표했고 한국은행은 외화 조달을 극대화하기 위해 외화 환매채 발행, 정부 외화 채권 발행, 현금 차관의 확대, 수입 연지급 범위의 확대, 항공기 구입의 리스 전환 등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면서도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은 최후까지 회피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1997년 11월 16일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극비리에 방한해 강경식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을 만나고 갔다. 20일에는 스탠리 피셔 IMF 부총재와 티머시 가이트너 미국 재무차관이 와서 신임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을 만나고 갔다.
나는 11월 21일 한국경제신문에 ‘IMF를 기피할 때가 아니다’라는 글을 썼다. 정부는 IMF의 구제금융에는 여러 가지 구속 조건이 붙기 때문에 기피한다고 하나 그 조건이란 어차피 우리가 자신을 위해 해야 할 구조개혁 과제들을 포함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외압 없이는 해야 할 일을 해본 일이 없고 이번에도 자력으로 필요한 구조개혁을 수행하지 못한 결과 오늘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IMF를 기피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IMF를 기피하면 국제사회는 우리가 필요한 구조개혁을 회피하고 있다고 보고 그로 인해 우리에 대한 신인도가 더욱 떨어질 것이라는 말도 했다. 결국 정부는 1997년 11월 28일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