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설과 논문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주도의 거시정책을 비판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먼저 1998년 1월, ‘이자제한법’을 폐지하고 중앙은행 콜금리를 한때 40%까지 인상해 전반적인 금리인상이 뒤따랐다. 일반적으로 부채비율이 높은 한국에서는, 비록 단기간이라 할지라도 연 20∼30%의 금리를 부담하고 살아남을 기업은 많지 않았다.
둘째로 국제결제은행(BIS) 자본적합비율이 문제였다. 은행의 자본금이 위험자산(대출)의 8% 이상이 돼야 한다는 BIS 기준에 따라 자본비율이 마이너스가 된 5개 지방은행과 16개 종합금융회사의 인가를 취소했고 자본비율이 취약한 은행들은 1999년 3월까지 6%, 2000년 3월까지 8% 수준으로 자본비율을 개선하라고 명령했다. 이것은 올바른 정책 방향이지만 그 시한에는 문제가 있었다.
우선 3월까지 목표를 달성하자면 약 50조 원의 자본 증자가 필요하다. 그중에서 16조 원은 정부가 지원한다고 했으나 나머지 34조 원은 금융기관 자체가 해결해야 할 몫이 된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및 기타 연구소의 보고서를 종합해 보면 34조 원은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주식 시가총액 64조 원의 약 53%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 규모의 신주를 내년 3월 말까지 증권시장에서 소화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주 발행에 의한 증자가 어렵다면 외국 출자자를 찾든가 아니면 자본비율의 분모가 되는 위험자산(융자금)을 감축할 수밖에 없다. 외국자본 유치에는 시간이 걸리므로 금융기관은 융자를 최대한 감축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1998년 상반기에 은행의 순 여신규모는 전년 동기의 23조 원에서 12조 원 수준으로 급락했다.
셋째로 정부는 IMF 권고에 따라 환율을 완전히 유동화했다. 그 결과 1996년 말 달러당 840원 하던 환율이 1997년 말에는 1962원으로 2배 이상 상승했다. 수출에는 도움이 됐겠지만 외채를 가지고 있는 기업이나 금융기관들은 막대한 환차손으로 재무제표가 일시에 악화돼 부실기업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었다.
고금리, 자금경색, 환차손의 3중고(苦)에 허덕이는 기업 일부는 어음 부도 또는 도산으로 몰려갔다. 이로 인해 은행의 부실채권이 늘어나니 자본비율 충족을 위해 또다시 여신을 조여야 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됐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은행 전체의 부실채권 비율이 1997년 5.8%에서 1998년 3월에는 7.3%, 6월 말에는 10.2%로 배가됐다.
끝으로 정부는 재벌에 대해 1999년 말까지 자본 대비 부채비율을 현재의 평균 400% 이상에서 200%로 낮추라고 요구했다. 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만약 이것을 신주 발행으로 충족한다고 치면 54조 원의 증자가 필요한데 이는 당시 상장주식 시가총액의 83.5%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금융업체와 대기업들이 동시에 신주 발행을 추진한다고 할 때 당시 증권시장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액수였다. 결국 기업의 인수합병(M&A)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볼 때 IMF 주도의 거시정책은 그 방향은 옳았으나 지나치게 현실을 무시하고 너무 조급하게 서둘렀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 같다. IMF는 그러한 충격요법을 사용했기에 단시일 내에 외환위기를 해소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IMF가 단순한 외환위기를 경제위기로 몰아갔다는 것은 경제지표가 말해주고 있다. 외환위기가 발생한 지 1년 후인 1998년 산업생산은 작년 동기 대비 10% 이상 감소했고, 10월의 수출은 전년 동월보다 12.1%나 감소했다. 살아남은 기업들의 가동률은 70% 내외로 떨어졌고, 7.3%의 최고 실업률을 기록했다. 1998년 경제성장률은 전년 동기 대비 1분기 ―5.3%, 2분기 ―7.9%로 급락한 데 이어 3분기(―8.1%)와 4분기(―6.0%)에도 크게 하락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