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애인이 상상할 수 없는 계단 느낌-강아지 짖는 소리
오감으로 느낀 이미지 그려 “미술은 그들의 자존감 상징”
서울 종로구 삼청동길을 걷다가 화동 쪽 골목길로 접어들면 ‘우리들의 눈’이란 갤러리가 나온다. 한국시각장애인예술협회가 지난해부터 운영 중인 이 갤러리는 시각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오감(五感)’으로 표현한 작품을 전시하는 곳이다. ‘시각장애’와 ‘그림’이라는 낯선 단어가 공존하는 이곳을 12일 찾았다.
○ “눈은 단지 오감의 일부일 뿐”
협회는 1997년부터 전국 각지의 맹학교 학생들과 미술수업을 함께하고 있다. 지난달 4일부터 ‘우리들의 눈’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미술은 오감이다, 시각장애학생 드로잉전(展)’에 출품된 작품들은 2004년부터 전국 각지의 맹학교 학생들이 학교와 집을 오가며 몸으로 느끼고 본 길을 표현한 것들이다. 엄정순 관장은 “미술은 오감의 산물이고 눈은 단지 그 일부일 뿐”이라며 “시각장애인들도 표현의 욕구가 있고 고유한 감각을 바탕으로 한 창작의 세계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우리도 새로운 영감을 받을 때가 많다”고 말했다.
맹학교 학생들의 작품에는 몸으로 느낀 이미지가 살아 있다. 한빛맹학교 윤석현 군(18)은 길을 걸으며 떠올렸던 이미지를 ‘오감지도(五感地圖)’란 작품으로 표현했다. 윤 군은 먼저 학교 복도와 계단을 ‘다다다다’ 소리를 내며 내려가다 느낀 감각을 점, 선, 면으로 그렸다. 윤 군은 직접 밟아보며 상상한 넓은 운동장의 질감과 멀리서 들려오던 강아지 짖는 소리까지 그림에 녹여냈다. 전봇대에 오줌을 싸던 강아지를 선생님이 데려다 줘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웃었던 기억도 작품에 그대로 이어진다.
바로 옆에 걸린 ‘킥보드를 타고 달린다’라는 작품은 윤성우 군(15)이 킥보드를 타고 신나게 달리고픈 욕망을 표현한 작품이다. 갤러리 입구에는 점자만으로 독특하게 이미지를 표현한 김지호 군(17)의 작품도 걸려 있다. 이 밖에도 학생들이 발바닥에 물감을 묻히고 하얀 도화지 위를 자유롭게 걸어 다니며 만든 작품 등 시각장애 학생들의 다양한 예술세계를 갤러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엄 관장은 “입시에 찌든 학생들과 달리 ‘노는’ 시간인 맹학교 미술 수업은 창의성을 마음대로 발산할 수 있는 진짜 미술 수업”이라며 “비장애인이 상상할 수 없는 무수한 이야기로 시각예술의 본질에 접근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 ‘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
협회는 요즘 ‘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도 기획하고 있다. 엄 관장은 “손으로 만져 ‘보는’ 코끼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지만 하나의 이미지만 코끼리라고 가르치는 것은 편견을 주입하는 것”이라며 “여건만 된다면 아이들이 코끼리 코를 직접 만져본 뒤 다양한 모습의 코끼리를 그려볼 수 있게끔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자 엄 관장은 갤러리 한쪽 벽을 가리켰다. 벽면에는 ‘지금은 침구사로 일하지만 맹학교 시절 받은 미술수업은 나에게 인간으로서 품위 있게 사는 자존감을 심어주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우리들의 눈’은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는 시각장애인 청소년들의 의지가 깃든 공간인 셈이었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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