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타계 성악가 오현명씨가 밝힌 가곡 ‘명태’와의 인연

  • 입력 2009년 6월 27일 03시 00분


“악보 보고 ‘노래가 뭐 이래’ 했는데… 나도 모르게 흥얼거려”

은관문화훈장 추서

“‘명태’는 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곡이 되었다. ‘명태’ 하면 오현명, 오현명 하면 ‘명태’가 바로 이어질 정도로 나의 대명사 격인 노래가 되었던 것이다.”

24일 별세한 ‘한국 가곡의 거목’ 오현명(사진)의 대표곡 ‘명태’에 얽힌 일화다. 그가 굵은 저음으로 너털웃음을 곁들여 부르는 ‘명태’에는 우리네 삶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현명은 25일 나온 유고작 ‘노래 나그네 오현명 자서전-다시 부르고 싶은 노래’(세일음악문화재단)에서 ‘명태’와의 인연을 소상히 적었다.

6·25전쟁 당시 오현명이 대구에서 공군정훈음악대원으로 활동할 때 유엔군 제7군단의 연락장교 변훈이 찾아왔다. 그는 종이뭉치를 던져주고는 황급히 돌아가면서 말했다. “내가 쓴 곡인데 한 번 봐줘. 그중에 ‘명태’라는 곡이 있는데, 그건 특히 자네를 위해 쓴 것이니까 언제 기회 있으면 불러 봐.”

“‘명태’ 악보를 보니, 그게 아무래도 노래가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야, 이거 무슨 노래가 이래?’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노래의 멜로디 같지도 않은 멜로디가 가사와 함께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흥얼거리게 되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정겹게 느껴지게 되었다.”

부산의 해군정훈음악대로 옮긴 그는 1952년 늦가을 부산의 한 극장에서 열린 ‘한국 가곡의 밤’ 무대에서 ‘명태’를 처음 불렀다. 홍난파류의 여성적이고 애상적인 가곡에 익숙했던 음악가와 청중은 이 노래를 듣고 ‘노래 같지도 않은 엉터리’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유명 음악평론가 이성삼은 ‘그것을 노래라고 작곡을 했느냐? 그게 무슨 가곡이냐?’라는 취지의 혹평을 신문에 싣기도 했다.

“내가 그 노래를 불렀던 초기에는 청중이 ‘무슨 노래가 저런가?’ 하는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쇠주를 마실 때, 카아∼’ 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웃으면서 관심을 갖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명태’는 1964년 10월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대학생을 위한 대음악회’에서 빛을 봤다. 앙코르를 요청하는 청중의 박수가 끝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나 자신이 변훈의 ‘명태’를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 것은 그 노래에 깃들어 있는 한국적인 익살과 한숨 섞인 자조와 재치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곡에서는 젊지만 전쟁의 소용돌이에 갇혀 자유로울 수 없는 영혼들의 자조 섞인 신세를 명태에 비유한 한탄조도 엿볼 수 있다.”

한편 정부는 26일 고인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고 밝혔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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