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형편 어려워 반주 - 레슨생활
유학은 콩쿠르상금 모은 어머니덕
유명연주회 들으며 표현법 배워
6월 28일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가 호쾌하게 끝나는 순간. “브라보!”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시폰 원피스 차림의 20, 30대 ‘누나 팬’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디토 페스티벌-베토벤 NO.5’(지휘 혼나 데쓰지)의 주인공은 이날의 협연자 피아니스트 김태형 씨(24·독일 뮌헨음대)였다. 그의 열 손가락은 영롱한 소리를 빚어냈다. 다섯 차례의 커튼콜 끝에 그는 슈만 환상모음곡 중 ‘동화 속 이야기’를 앙코르곡으로 쳤다. 연주가 끝난 뒤 출연자 대기실에서 그를 만났다.
“공연 전에 계속 중얼거렸죠. ‘떨린다고 못하진 않잖아.’(웃음) 무대에서 즐기기가 쉽지 않아요. 수없이 연주해본 곡이라 해서 늘 잘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는 공연 이틀 전 호암아트홀에서 디토 오케스트라와 함께 가진 첫 리허설을 얘기하면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연주에 여유도 없고 즐기지도 못하고…. 얼마나 마음에 안 드는지 스스로를 다시 채찍질하는 계기가 됐어요.”
2004년 포르투 국제 피아노 콩쿠르 1위와 베토벤 특별상 수상, 2006년 하마마쓰 콩쿠르, 2007년 롱티보 콩쿠르 입상, 2008년 스위스 인터라켄 클래식 콩쿠르, 프랑스 그랑프리 아니마토 콩쿠르 우승, 서울국제음악콩쿠르 3위….
수년간 잇달아 국제 콩쿠르에서 쾌거를 거둔 이 청년은 ‘불만족스러운 연주’를 통해 큰 자극을 받는다고 털어놓았다. “20대 중반, 지금이 피아니스트에게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가 생각해요. 어렵고 좁은 길을 걸어가려니 두려울 때가 많아요. 생각만큼 술술 풀리는 게 아니란 것도 알고요. 지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죠.” 예원학교 시절부터 그를 지켜본 음악칼럼니스트 유혁준 씨는 김 씨를 두고 ‘노력하는 천재’라고 했다.
그는 지난해 9월 독일로 떠나기 전까지 한국에서의 생활을 “앞으로 달려가기만 했던 날들”이라고 표현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반주, 레슨 아르바이트는 들어오는 대로 했다. 서울 예술의 전당 교향악 축제의 협연자 오디션 반주도 도맡아 했다. 유학 자금은 유로화로 받아 모아둔 콩쿠르 상금. “엄마가 콩쿠르 상금을 현금 그대로 집에 보관해두셨더라고요.(웃음) 최근 환율도 급등했는데 참 고마웠죠.”
“한국에선 생활에 쫓겨서 산 것 같아요. 독일에선 밥 해먹고, 연습하고, 레슨 받고, 산책하고, 공연 보고, 이런 단조로운 생활의 반복이죠. 한적한 길, 너른 공원을 걸으면서 음악적 상상력을 키워요. 이제야 진짜 학생이 된 기분이에요.”
독일에서는 100유로가 넘는 연주회를 학생은 20유로 정도에 볼 수 있다. 마에스트로 샤를 뒤투아가 휘두르는 지휘봉에서 눈을 떼지 못한 적도 있고, 로린 마젤이 이끄는 스페인 발렌시아 오케스트라 공연, 바이올리니스트 프랑크 페터 치머만 연주회도 감명 깊게 들었다. “올해 초 예브게니 키신 연주회도 갔어요. 연주회를 통해 아, 저 대목은 저렇게 표현하는구나, 손가락은 저렇게 쓰는구나, 배우지요.”
그는 “아직 배움의 길에 있는 까닭에 ‘어떤 연주자가 되고 싶다’라고 감히 말할 수 없다”고 했다. 2005년 후두암으로 투병하던 아버지를 잃었다. “장례를 치른 직후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일본 하마마쓰 피아노 아카데미에서 연주를 하다 깨달았어요. 음악이 지닌 진정한 위로의 힘을.”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