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 손가락 골절… 좌절 ‘라라’와 함께 시련 이겨냈죠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 씨(22·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과정)가 4월 서울국제음악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1등하려고 지금까지 잘 안됐구나. 이제 날개 훨훨 펴.” 아버지(서울대 성악과 강병운 교수)는 “자신감 생겼지?”라고 했다.》 독일서 자라 한예종 영재 입학 올 서울 국제음악콩쿠르 우승
힘들때마다 긍정적 생각 노력 부담 떨친뒤 음악 온전히 사랑 독일에서 나고 자란 강 씨는 일곱 살 때 현지 일간지가 특집 기사로 다룬 ‘바이올린 신동’이었다. 여덟 살 때 서울에서 한국 데뷔 무대를 열었다. 독일에서 국제학교에 입학할 때는 명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 추천서를 써줘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녔다. 연주 일정이 꽉 차 호텔 방에서 학교 숙제를 팩스로 받을 정도였다. 그러다 11세 때 농구를 하다 왼쪽 새끼손가락이 부러졌다. 누군가 밀쳐서 펜스에 부딪쳤는데 새끼손가락 뼈가 으스러지면서 신경을 건드렸다. 두 차례 전신 마취를 하고 수술을 받았지만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았다. 제대로 운지를 할 수 없었다. “병원에서 앞으로 바이올린은 못 한다고 했어요. 빌린 바이올린도 반납했죠. 슬퍼해도 아무 소용없는 일이구나…. 성악, 작곡, 음악치료, 역사, 심리학까지 여러 분야를 기웃거렸어요.” 물리치료를 받으며 다시 바이올린을 잡기까지 2년 반이 걸렸다. 어린 시절부터 해오던 거여서 취미삼아 했지만 매일 연습했다. “내 귀는 이미 높은 수준인데 다섯 살 때보다 못한 연주를 하고 있으니 신경질이 나더라고요. 지금도 새끼손가락이 비 오면 쑤시고, 무리하면 지판에서 미끄러지는데 그때는 오죽했겠어요.” 손가락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자 그는 ‘어쩌면 오케스트라 단원을 할 수도 있겠다’는 꿈을 꿨다. 2003년 귀국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다른 종류의 슬럼프에 빠졌다. 엄격한 사제와 선후배 관계, 타인에게 관심이 많은 한국 문화…. 2005년 벨기에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와 핀란드 시벨리우스 콩쿠르에서도 준결선 진출에 그쳤다. “예전에는 ‘참 운이 없다’ ‘결과가 이상하다’ ‘내가 못하는구나’ 이런 좌절에 온통 빠져 있었어요. 그래선 안 되겠더라고요. 운동으로 체력을 기르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 위해 애썼죠. 곡의 배경, 작곡가의 삶 같은 음악 공부도 깊이 파고들었어요.” 이후 2007년 스위스 티보 바르가 콩쿠르 3위 입상, 올해 서울 국제음악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뒀다. 두 무대 모두 그가 ‘라라’라고 부르는 연습용 바이올린과 함께였다. 1999년 아버지가 900만 원을 들여 사준 악기다. 최근 악기 가게에서 “활 값은 얼마냐”고 물었더니 “모르는 편이 낫다”는 답만 듣고 왔다. “내 악기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다른 사람처럼 수천만 원에서 억대에 이르는 악기가 아니니까요. 활도 마찬가지예요. 악기도 생명을 가진 나무로 만들었으니 사랑으로 대하면 언젠간 나를 따를 거라고 생각했고 정말 그렇게 됐어요.” 서울국제음악콩쿠르에서 그의 연주를 지켜본 바이올리니스트 최은규 씨는 “연습용 바이올린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소리를 냈다”고 말했다. 그는 ‘공백 기간’을 지나왔기에 신동에서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신동으로 불린 수많은 아이가 훗날 진짜 연주자로 활동하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어요. 길고 긴 슬럼프에 빠지는 아역배우도 많고요. 뭔가 해내야 한다는 부담을 완전히 벗어던질 수 있었기에 음악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었어요.”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