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사는 아무 대가 없이 나의 손을 잡아 주었다. 당시 한국 경영자로서는 드물게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석유화학 사업체를 운영한다는 희귀한 여자 사장의 당당한 간청이 그들에게 거절할 수 없는 무엇을 느끼게 했던 모양이다. 걸프사는 일본의 유력회사와 나프타 및 오르토크실렌을 서로 교환하도록 중개해 줬고, 애경은 공장 가동 중단이라는 최악의 위기를 넘겼다. 나는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지금까지도 걸프사의 제품을 최우선으로 선택해 구입한다.
올해로 내가 남편과 결혼함으로써 인연을 맺은 지 50주년이 된다. 남편이자 애경 창업주인 채몽인은 친정어머니 친구의 아들이었는데 광복 이후부터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서 이웃사촌으로 지냈다. 당시 우리 집에는 친척이 자주 드나들어 대문을 늘 열어놓은 상태라 항상 방문객이 많았는데 남편은 거의 매일 오는 이웃이었다.
그는 내가 유학을 간다고 하자 반도호텔의 중국요리집에서 거창하게 송별회를 해주었다. 그날 우리 어머니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한 모양이지만 나는 유학을 앞두고 있어 거절했다. 그러자 남편은 사업을 핑계로 수시로 미국으로 찾아와서 결혼 승낙을 받으려고 애썼으며 여름방학에는 아예 눌러앉아서 졸라댔다. 이렇게 4년여의 뉴욕 청혼 작전에 항복한 나는 귀국 후 1959년 6월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하기 전, 남편은 1954년 인천 송월동에 대지 1782m², 건물 1221m²의 공장에서 자본금 5000만 환으로 애경유지공업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종업원 50여 명과 함께 비누사업을 시작했다. 첫해에 세탁비누 23만 개를 생산했는데 당시만 해도 겨비누나 양잿물로 세탁을 하는 등 국산 비누나 세제가 귀했던 시절이라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당시 우리나라 비누 제조업은 극히 원시적이었고 원료도 외국에서 비싼 값으로 사들여 오는 실정이었다. 남편은 버려진 지방과 기름에서 뽑아낸 글리세린을 완전히 회수해 비누 제조에 재활용함으로써 외화를 절약해 국민과 정부로부터 신뢰와 칭송을 받았다. 한국 화학공업계의 원로인 김동일 박사가 애경유지공업을 한국 화학공업계의 효시라고 할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이듬해부터 애경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화장비누 제조시설을 갖추고 화장비누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수요가 급증하는 비누를 안정되게 공급하기 위해 지방산 분해시설 공장이 필수적이라는 선견을 가졌던 남편은 당시 서울 영등포구 구로동에 연면적 3234m²의 지방산 분해시설 공장을 건설했다. 애경은 1956년 국내 최초로 순수 국내 기술에 의한 화장비누인 ‘미향비누’ 3만5000여 개와 ‘국산비누’ 5만여 개를 생산하며 본격적인 화장비누 시대를 열었다.
1958년에는 미향비누만 한 달에 100만 개를 판매하는 기록을 세웠다. 공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아갔다. 애경은 세탁비누와 화장비누 부분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인천과 서울을 왕래하는 화물차량의 대부분이 애경유지공업의 제품을 운반하는 차량이었다는 신화를 남겼다.
남편은 나와 결혼할 당시 한창 공장을 짓고 있었다. 외국에서 영어로 된 기계설비 설명서가 날아들자 남편은 미국에서 유학을 했다는 이유로 번역작업을 모두 나에게 맡겼다. 이것이 결혼 뒤 삶의 99%를 살림과 육아에 투자한 내가 남편의 사업에 관여한 1%의 기여분이었다.
1960년대 들어 남편은 당시만 해도 외국에서나 볼 수 있던 백색의 ‘우유비누’를 내놨다. 우유비누는 남편이 생전에 내놓은 가장 야심 찬 작품으로 한국 비누산업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걸작으로 손꼽힌다. 1966년에는 주방용 세제의 일반명사가 돼버린 트리오를 내놓으면서 애경은 생활필수품 세제 전문회사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며 승승장구했다.
남편이 수완 좋은 사업가로 재계에 명성을 날리던 1970년 7월 12일. 일요일이었던 그날 나는 넷째 출산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남편은 전날인 토요일 밤, 큰아들 형석이에게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등산을 가자”는 약속을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으레 일찍 일어나곤 했던 남편은 일어나지 못했다. 형석이와의 약속도 영원히 지키지 못했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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