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 붙은 방으로 드릴까요, 마주 보는 방으로 드릴까요, 아니면 아주 떨어진 방으로 드릴까요?”
외국은 계열사 사장이나 담당 임원과 함께 간다. 이럴 때면 남녀가 함께 여러 가지 예약을 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곤욕스러운 상황이 적지 않았다.
계열사 사장 중에 장 사장이 있었다. 그와의 출장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은 비행기에서부터 시작돼 호텔에서 정점을 이루곤 했다. 분명히 방을 두 개 예약했는데 막상 호텔을 찾아가 보면 대부분 한 개의 방을 마련해 두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방 하나를 추가로 달라고 하면 귀찮은 질문이 이어졌다. ‘미스터 장’과 ‘마담 장’이 별도의 방을 요구하면 ‘부부싸움’을 했다고 생각하고 방 위치까지 꼬치꼬치 따져 물었다.
나는 “저는 비서예요”라면서 쓸데없는 호기심을 잘라버리곤 했다. 외국에서도 여자 최고경영자(CEO)가 드물기 때문에 나를 비서로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비서라고 말해야 미스터 장과 마담 장의 부부싸움을 구경하고 싶은 엉뚱한 호기심을 차단할 수 있었다.
출장뿐 아니다. 사업을 하면 여성이라서 불리한 일이 참 많다. 접대가 대표적이었다. 내가 1972년 경영에 막 들어섰을 때는 특히나 바이어를 위한 접대가 사업의 향방을 결정할 정도로 극성이었다. 중요한 바이어를 접대할 때는 대부분 기생집에 데려가는 것이 관례였다.
1973년 12월 25일 일본 하네다공항 일본항공(JAL) 사무소 앞에서 한국으로 떠나는 일본 여행객을 상대로 일본 여성 20여 명이 피켓시위를 벌이는 걸 본 적이 있다. 이들은 한국으로 향하는 JAL 탑승자들 앞에서 ‘기생관광을 위한 한국여행은 집어치워라’ ‘매춘관광 반대’라는 내용이 적힌 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유인물을 뿌려댔다.
그만큼 당시 한국에서 기생집 접대는 흔했고 기업을 경영하는 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필요악이었다. 바이어가 한국에 오면 얼마나 잘 접대를 받았는지 기생집의 수준을 척도로 삼을 정도였다. 회사를 맡고 나서 나도 남성 경영자에게 질 수 없다는 생각, 그리고 솔직히 잘 모르는 세계였으므로 호기심을 느껴 처음에는 합석했다.
여성으로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자리였다. 같은 여성으로 보기가 너무 안 좋았고, 자존심도 상했다. 또 접대를 다 챙기다 보니 네 명의 어린아이를 둔 엄마로서 귀가시간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 경영자로서의 한계를 느꼈다. 이런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면 사업 기회를 놓치고 정보를 못 얻어 사장으로서 역할과 책임을 못하는 것은 아닌지, 이러다 회사를 망치는 것은 아닌지 자책도 들었다. 하지만 정도를 벗어난 바이어 접대 대신 상식과 정정당당한 경영실력으로 맞서겠다는 오기를 품게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기생집에 손님을 모셔야만 할 때 저녁만 먹고 자리를 비켜주는 방식을 택했다. 내가 자리를 떠난 이후의 거래는 담당 임원이 맡도록 했다. 그런 원칙을 지키다 보니 회사 직원은 물론 바이어도 당연히 그러려니 생각하고 부르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자리를 함께하지 못하는 데 대한 손해도 보지 않았다. 중요하게 상의해야 할 일이 있으면 상대방의 사무실로 직접 찾아가 얘기했다.
나는 어려운 위기에 처했을 때 여자임을 빌려 피하지 않았다. 운명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애를 썼고 여자라는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어 성공의 발판으로 만들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그 결과 어려운 고비를 맞고, 고비를 넘길 때마다 더 큰 자신감과 지혜가 생겼다.
가끔 나를 보좌하는 여러 남성 임직원이 여사장을 모시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헤아려본다. 혹시 이 점 때문에 회사 발전이 영향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여자라고 사장이 할 일을 미룬다든가 소홀히 한 적은 결코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내 확신이 내 생각뿐이 아님은 곧 외국 바이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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