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애경과 거래하는 외국 업체 사이에 나는 ‘터프 우먼’으로 통하게 됐다. 여자라서 더 부드러우리라고 기대했다가 더욱 원리원칙대로, 최대한 유리한 조건을 뽑아내는 나에게 꼼짝 못하겠다는 뜻이다. 결국 일을 하는 사람이 남자냐 여자냐보다는 어떻게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나는 본의 아니게 재계의 대표적인 ‘여장부’ 또는 ‘여걸’로 알려졌다. 하지만 사업을 시작한 처음부터 내가 남들이 말하는 여장부 같았던 것은 아니다. 사회 초년병이자 ‘초짜 사장’을 맡은 경영 초기에는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1970년대 초 울산의 석유화학단지에서 삼경화성(현재 애경유화)을 비롯한 몇몇 업체의 입주식이 열렸을 때다. 박정희 대통령이 온다고 해서 석유화학단지 입주기업 사장이 모두 모여 대통령의 예상 질문에 맞춰 리허설을 했다. 입주기업 중에는 장군 출신 등 화려한 경력을 가진 사장이 많았다. 박 대통령이 리허설을 한 사람을 모두 제쳐놓고 뜻밖에 나에게 “댁에서는 무엇을 만드느냐”고 물어왔다. 홍일점이라 눈에 잘 띄어서 박 대통령이 질문을 한 모양인데, 여성이라 유리하다고도 할 수 있는 그런 경우에도 나는 여성이라는 자격지심에 위축되곤 했다.
어떤 경제인 모임에서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훌륭한 사람만 모인 자리에 보잘것없는 여자가 끼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부끄럽고 무안해 사람의 시선을 피해 기둥 뒤에 숨어 있다 온 적도 있었다. 여성이라는 자격지심에 어딜 가든 날마다 긴장하고 깜짝깜짝 놀라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한 번은 관련협회에서 사장단 회의를 개최했는데 참석해 보니 그때도 여성 사장은 나 혼자였다.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되겠지…” 하고 조마조마하게 앉아있는데 갑자기 의장이 내 의견을 물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별일도 아니었는데 얼굴이 벌게졌다. 지금 같으면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당시 여자를 무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나 스스로가 만든 열등감의 결과였다.
회사를 운영하는 데 매우 중요한 대외 활동 중 하나가 관공서 출입이다. 나는 관공서에 들어가는 일이 무척 부끄럽고 어려웠다. 대부분 해당 업무를 맡은 임원이 동행해 가기 전에 미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가르쳐줬다. 막상 관청에 들어가 담당자를 만나고 대화를 시작하면 나는 가르쳐준 이야기를 모두 잊어버리고 내 생각과 실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기 일쑤였다.
한 번은 전무를 맡은 임원과 관공서에 갔다. 담당 공무원의 질문에 내 성격대로 곧이곧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누군가 책상 아래로 다리를 세게 걷어찼다. 하면 안 되는 이야기를 너무 솔직하게 얘기하니까 못 하게 하려고 함께 갔던 전무가 구둣발로 내 다리를 걷어찼다. 모른 척했으나 나중에 보니 멍이 시퍼렇게 들었다.
초짜 사장이라는 두려움과 여성으로서 느끼는 현실적인 한계, 오일쇼크라는 대외적인 어려움….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잠자리에 드러누울 때 “아예 못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내가 이런 일로 힘들어 할 때면 주변의 여자 친구들이 가장 큰 힘이 됐다. 친구들은 “여성의 대표로 나갔으니 네가 실패하면 여성 전체가 망신”이라며 강박감과 함께 자신감을 심어줬다. 이런 일을 몇 번 겪고 난 후 내린 결론은 모든 활동은 사장이면 해야 할 역할 중의 하나라는 점이었다. 거기에 성별의 구별은 있을 수 없으며, 결국 여자 스스로 만든 굴레일 뿐이다.
초년 시절에 내가 겪은 이런 고생은 경영자로서, 또 여성으로서 마음가짐과 자세를 확실하게 단련하는 기회가 됐다. 덕분에 나는 몇 년 안돼 여성 기업가로서 내 나름의 기업관과 경영관을 확립했다. 그리고 비슷한 어려움이 터졌을 때 순조롭게 풀어 나갈 귀중한 자산을 얻었다. 좌초 직전에 몰린 ‘애경호’의 위기 극복을 위한 대회전도 내가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시작할 수 있었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