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간 ‘애경호’를 성공적으로 이끌던 선장이 갑자기 사라지고 엉뚱한 여자가 새로 키를 잡았을 때, 주위의 시선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이미 럭키, 동산유지 등이 유지업계에 진출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선장을 잃은 배가 그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리라고 예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1972년 8월 1일 정식으로 애경유지공업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한 나는 단순한 비누 제조업보다는 화학분야가 앞으로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 분야를 적극적으로 개척해 애경의 미래좌표로 삼기로 했다.
내가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데는 1970년대 국가경제를 재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산업 부문이 화학공업이라고 인식했고, 한편으로는 내가 미국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해 나름대로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다는 자신감도 한몫했다.
하지만 잘해보겠다는 욕심만으로 겁 없이 경영에 뛰어든 내게 주위의 기업 환경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첫 시련은 1973년 말부터 약 3년간 세계를 뒤흔든 1차 오일쇼크였다.
1차 오일쇼크는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와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아랍에 우호적이지 않은 국가에는 석유금수조치를 취하고, 원유가격을 4배 가까이 대폭 인상하는 등 ‘석유무기화정책’을 쓰면서 시작됐다. 이 여파로 미국 일본 등 주요 경제 선진국은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했고 1974년 제로 성장, 그 이듬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는 등 최악의 경제상황을 맞았다.
국내 경제는 예외 없이 경기침체 인플레이션 국제수지 악화 등 삼중고에 시달리면서, 정부는 석유류 출고가격을 평균 30% 인상하는 것 외에 물가안정을 위해 원목, 시멘트 등에 대한 가격조정 사전승인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정부의 다양한 대책에도 불구하고 1974년 2월 1일 당시 태완선 경제기획원 장관, 장예준 상공부 장관, 김신 교통부 장관 등 3부 합동기자회견에서 유류 가격을 평균 82.0%, 전력 요금 30.0%, 시내버스 요금 20.0%, 택시 요금 66.1%, 철도 화물 요금 5.0% 철도 승객 요금 15.0%, 해운 요금 50.3∼109.3%, 항공 요금 60.3%, 고속버스 요금 20.0%, 시외버스(완행) 요금 32.0% 등 각종 서비스 요금을 올린다고 발표하자 소비가 급격히 줄어들어 대내외적 경영 환경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전 세계가 몸을 움츠리고 있던 경제위기 당시 나는 시설투자와 해외 시장 개척으로 대표되는 불황탈출 전략을 세웠다.
극심한 원부자재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 미쓰비시가스케미컬사, 미국 걸프사 등을 직접 방문해 필요한 원부자재를 확보했고, 1976년 11월에는 도쿄 홍콩 자카르타 방콕 싱가포르 카이로 아디스아바바 등 동남아 및 중동지역을 직접 방문해 시장조사를 벌였다. 이런 과정에서 내가 직접 실무자를 자처하고 발로 뛰었다.
이 같은 해외시장 개척 결과, 우유비누 유아비누 크린업 트리오 등 회사 창립 이래 첫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특히 국내 비누 및 세제 전문 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홍콩에 진출해 업계의 비상한 주목과 관심을 받았다. 이런 노력으로 나는 1976년 수출의 날에 수출유공자상을 받기도 했다.
또 대전에 총건축면적 8260여 m²(약 2500평) 규모의 합성세제 공장 건설에 나서는 파격적인 투자 결정도 내렸다. 지금은 ‘불황일수록 시설투자를 하라’는 게 경영의 상식이 됐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나는 ‘당장은 경기가 꽁꽁 얼어붙었지만 막 세탁기가 보급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조만간 합성세제가 세탁비누를 대체할 것이다’고 보고 이런 결정을 내렸다. 1974년 6월 24일 첫 삽을 뜬 대전공장이 1975년 7월 준공될 무렵, 예상했던 대로 합성세제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비누 수요를 훨씬 앞질렀다.
이렇듯 애경은 선장의 손바뀜을 큰 탈 없이 극복하고 다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새 선장이 제시한 ‘화학’이라는 미래좌표를 향해 항해를 했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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