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87>‘愛人敬天’ 도전 40년

  • 입력 2009년 9월 17일 02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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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공장 예찬
1962년 주부들 비누 사재기 파동
70년대 들어 대부분 회사 문닫아
대전에 공장 지으며 돌파구 마련

사업 초기 애경의 역사는 공장 건설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1954년 창업의 토대가 된 인천 공장에서 세탁비누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영등포 공장에서는 비누와 합성수지, 합성세제, 도료, 무수프탈산(PA)을 만들었다. 울산공장에는 무수프탈산 생산설비를 갖췄고 대전에서는 이탈리아 발레스트라사에 시설을 발주해 1975년 최신식 합성세제공장 준공식을 거행하며 대전 시대를 열었다. 이들 공장의 건설과 이전, 확장에 맞춰 사업도 변화하고 진화했다. 제조업 기반의 사업을 오랫동안 벌여 왔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공장에 대해 느끼는 사랑은 각별하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금도 연례 공장 발표대회 등 공장 행사만큼은 직접 챙기려고 노력한다.

한때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공돌이나 공순이라고 부르며 그 직업을 부끄러워하고 기피하는 젊은이가 많았다. 아무리 첨단산업이 발달한다고 해도 우리의 기본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물건을 생산하는 곳은 공장이다. 우리 공장은 물론이고 현재 대부분의 공장이 고도의 자동화 설비를 갖췄지만 자동화가 진행된다고 해서 반드시 직원 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기계가 발달해도 기계가 할 일과 사람이 할 일은 구분될 수밖에 없다. 공장은 가장 생산적인 장소이며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은 인간의 모든 직업 중에서 가장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래서 공장을 사랑하며 공장 가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

여러 공장 가운데 1975년 준공한 대전 공장은 지금의 애경을 이룬 첫 전환점이 된 곳이다. 나는 대전 공장 준공을 통해 당시 기울어가는 비누업계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배경은 이랬다. 1962년 당시까지 애경유지가 정부로부터 독점적으로 공급받던 우지를 럭키화학과 평화유지 등 2개 회사와 분점하게 됐다. 다행히 애경유지는 기존 확보량이 넉넉해 경쟁사보다 우지를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그해 가을 원료를 확보하지 못한 경쟁사가 제품 출하에 차질을 빚자 도매상뿐 아니라 일반 주부도 비축심리가 발동해 비누 사재기를 시작했다. 당시 정부의 외환보유액이 고갈돼 우지를 추가로 수입하기 힘들게 되자 사재기가 시작되고 비누 가격이 2배 이상 폭등했다. 애경은 당국과 정책적인 협조를 통해 위기를 넘겼지만 비누 파동은 비누 산업의 한계를 느끼는 계기가 됐다.

1970년대 들어서자 애경 동산유지, 말표 천광유지, 럭키 등 비누 회사 10여 개 가운데 몇 개 회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회사는 모두 경영 부실로 문을 닫았다. 원래 생활용품 회사가 망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인플레이션과 정부의 규제 탓이 컸다. 야채와 농산품 가격은 20% 이상 올랐는데 비누는 5% 인상도 어려웠다. 정부가 공산품을 규제하면서 비누를 가격 감시 품목으로 지정했기 때문이었다. 인건비와 원료비는 상승했는데 가격은 못 올리자 경영 부실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했고, 여러 회사가 노력을 기울였지만 많은 회사가 문을 닫았다. 1979년 세탁비누는 중소기업 고유 업종으로 지정돼 애경유지 역시 회사 탄생의 모체인 세탁비누 생산을 중단했다.

이런 비누 산업의 쇠퇴 속에 나는 대전 합성세제 공장 건설에 나서면서 사업 전환을 시도했다. 세제는 원료부터 제품까지 부피에 비해 무게가 많이 나가 유통이 가장 중요했다. 이 때문에 공장입지로 유통이 유리한 곳을 우선 찾았다. 우리나라의 중간지점인 대전은 물동량이 많아 원료를 들여오고 완성된 제품을 수송하는 데 유리했다. 나는 공장 용지와 설비 외자를 물색하고 도입하는 과정에서 현지답사는 물론이고 설비 개발자를 만나 외자 도입을 교섭하는 등 대전 공장의 기틀을 잡는 대부분의 과정을 직접 챙겼다. 대전 공장 건설에 들어간 돈은 외국에서 들여온 자금이 60만 달러, 국내에서 조달한 자금이 8억 원 안팎이었고 공사에 동원된 연인원은 3만5000명에 달했다.

이처럼 세제 산업의 패러다임이 합성세제 중심으로 바뀌는 가운데 1980년대 들어서는 화장비누 시장 역시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외국 브랜드 제품이 물밀 듯 쏟아지고, 소비자의 욕구는 날로 고급화됐다. 애경호에 또 다른 대형 파도가 밀려들고 있었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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