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액이 1977년에 100억 달러를 넘어 경상수지가 균형을 이루자 정부는 1978년 수입자유화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수입자유화조치를 단행했다. 1980년대 들어 선진국이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하고 수입 개방 압력이 높아지면서 국내기업도 시장 개방에 대비해 잇따라 경영 전략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비누 시장에도 외국 브랜드 제품이 쏟아지면서 제품이 다양해지고 비누에 대한 소비자의 수요가 빠르게 고급화됐다.
애경은 창업 뒤 우리 자본, 우리 기술, 우리 제품을 고집했다. 대전 공장을 지을 당시에도 주 제조설비를 이탈리아에서 들여오긴 했으나 국내에서 제작할 수 있는 연속 자동 반응시설은 국내기업에 발주해 제작했다. 그러나 국제화 시대를 맞아 한국 비누업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영 참여 초기, 사업에 대해 잘 모른다는 긴장감 때문에 외국 선진국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자주 해외 시장을 둘러봤다. 선진국 비누회사의 생산기술과 마케팅, 경영 기법은 우리 회사와 품질의 차이가 분명했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 애경유지는 1980년 ‘포인트 비누’를 내놨지만 날로 고급화되는 소비자의 취향을 따라가고 시장을 선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출장을 통해 둘러본 선진 외국 기업의 고도 기술을 우리 제품에 접목해 제품의 품질을 향상시키고 외국 기업의 국내 시장 진출에도 맞서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해외에 나가면 해당 국가의 슈퍼마켓을 돌며 시장조사를 하고 각종 제품 정보를 취합하곤 했는데 이런 과정에서 대형 회사와 접촉 기회가 잦았고, 자연스럽게 유럽의 주요 다국적기업 여러 곳과 접촉했다. 이런 네트워크를 통해 1982년 1월 애경유지는 식료품, 합성세제, 방취제품에 대해 세계 최대 브랜드를 보유한 영국의 유력 회사와 기술 제휴를 맺게 됐다.
정부의 정식 인가를 거쳐 1982년 8월 이 회사와의 기술 제휴에 따라 생산한 럭스 비누를 시판했다. 기술 제휴 회사의 마케팅 매니저가 한국에 상주하면서 마케팅 지원에 나섰다. 12월에는 모발용 제품 제조기술 계약 체결에 따라 샴푸 및 린스도 생산하기 시작했다. 기술 제휴에 따라 생산한 비누와 샴푸가 소비자에게 인기를 끌면서 두 회사는 합작사 설립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오랫동안 많은 생각을 하며 번민했다. 첫째, 전 국민을 상대로 순수 국민기업인 애경유지가 외국과 합작하는 방안이 과연 옳은가 하는 질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는 개념이 한국에서 보편화되지 않은 때라 경영자에게 외국 기업과의 합작 사업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둘째로는 비누 세제 계열은 남편이 남긴 유업인데 합작을 함으로써 남편의 뜻에 반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이었다.
당시 큰아들(현 채형석 그룹 총괄부회장)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을 장남에게 내 고민을 상의해야 할 것 같아 보스턴으로 달려갔다. “나는 이제 애경유지 말고도 다른 기업이 있다. 하지만 애경유지는 아버지가 남긴 가업이다. 이제 합작을 해야 할 상황인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네가 클 때까지 지키고 있다가 그대로 물려주려고 했는데 어미가 회사 팔아먹었다고들 하지 않겠느냐? 네가 실질적인 주인이니 잘 생각해 봐라.”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뭇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자 영국 회사에서 재촉하기 시작했다. 합작이 내키지 않던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그들이 도망갈 만한 조건만 내세우기로 했다.
첫째, 기술과 생산 모든 것을 들여오되 기술료는 따로 내지 않는다. 둘째, 생활용품뿐 아니라 다른 제품을 한국에 가져올 때는 애경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 합작은 50 대 50으로 하되 회사가 한국에 세워지는 만큼 애경 중심으로 경영한다. 넷째, 기존 상표 가운데 애경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원하는 상표만 쓰겠다. 즉, 별다른 광고 없이도 한국민이 이미 잘 아는 상표만 쓴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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