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좋은 약 하나 소개해 드릴게요. …다음 대사가 뭐더라.”
23일 강원 춘천시 동내면의 한 교회에 마련된 할머니 극단 ‘로맨스그레이’의 연습실에서는 연방 폭소가 터져 나왔다. 할머니 배우들이 대사를 제대로 못 외운 탓에 자주 NG를 내기 때문이다. 다른 극단 같으면 연출자의 불호령이 떨어지겠지만 이 극단은 배우나 연출자나 웃음으로 대신한다. 대사를 자주 잊다 보니 늘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애드리브. 조연출 전은주 씨는 “우리 연극의 대사는 절반이 애드리브”라고 말한다.
“눈이 침침해 글씨를 못 읽는데 대사를 어떻게 외워. 그리고 농사지으랴, 손자 손녀들 돌보랴 바쁜데 이만하면 잘하는 거지.”
로맨스그레이 단원 7명의 나이는 62∼77세. 그래도 연습실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나이를 잊은 연기에서 묻어나는 열정은 젊은 배우들 못지않다. 이들은 2005년 6월 창단 당시만 해도 연극이라고는 구경조차 해본 적 없는 농촌 마을의 할머니들이었다. 문화커뮤니티 ‘금토’가 노인문화예술교육사업의 하나로 동내면 학곡리 경로당 할머니들을 중심으로 창단한 것. 처음에는 12명이 시작했지만 해가 지나면서 건강 등의 이유로 5명이 하차했다.
로맨스그레이는 창단 이후 매년 한두 차례 공연을 해 왔다. 29일 무대에 올리는 ‘분홍 립스틱(부제 엄마의 그림자)’이 다섯 번째 작품이다. 배우들은 5월부터 매주 두 차례 연습에 매진해 왔다. 이 작품은 남편을 일찍 떠나보내고 딸 부부와 함께 사는 70대 할머니의 고단한 삶을 그렸다. 약장수의 꾐에 빠져 약을 비싸게 산 뒤 딸에게 구박 당하는 장면 등 실생활에서 겪을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잘 녹아 있다. 첫 주연을 맡은 극단 최고령자 위임순 할머니(77)는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린 할머니 연기를 잘 소화하고 있다.
“대사가 거의 없어 쉬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야. 그래도 연극 연습을 할 때면 마음의 응어리가 다 풀어지는 것 같아. 노년에도 삶의 활력소가 되는 것 같아 좋지.”
이번 공연의 연출은 극단 연극사회의 단원인 양흥주 씨가 맡았다. 공연은 춘천시 여성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관람료는 무료다. 29일 춘천시 옥천동 봄내극장에서 오후 4, 7시 두 차례 공연된다.
춘천=이인모 기자 i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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