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짝 열린 교문… “아픈 상처 씻고 꿈 키워요”

  • 입력 2009년 10월 2일 02시 45분


성매매 피해 청소년 20명
‘늘푸른 자립학교’ 1기생 입학
“떠난 학생도 언제든 환영”

빨간 체크무늬 주름치마에 잘 다려진 흰 남방. 지난달 29일 ‘늘푸른 자립학교’ 입학식에 3년 만에 입고 간 교복이 김지은(가명·16) 양에게는 아직 어색하다. 중학교 3학년 때 가출하면서 무작정 낸 자퇴서와 함께 교복도 버렸기 때문이다. “제 기억 속의 집은 전쟁터였어요. 성격 장애가 있는 아빠는 엄마랑 하루도 안 쉬고 싸웠고 오빠는 만날 사고만 치고. 도저히 못 있겠어서 집을 나왔죠. 학교는 당연히 관둬야 했고요.”

집과 학교를 나온 뒤로는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날들이 시작됐다. “19세라고 나이를 속이고 아는 언니한테 주민등록증이랑 통장을 빌려서 아르바이트도 해봤어요. 대형마트에서 주차 안내원도 했고 미용실에서 손님들 머리도 감겨줬죠.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종일 서서 일했는데도 한 달에 겨우 60만 원 벌었어요.”

당장 내일 아침에는 뭘 먹을지, 어떻게 하면 그날 밤 거리 노숙만은 피할지, 14세 소녀에겐 너무도 버거운 고민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1년간 이어졌다. 그러다 길에서 만난 친구가 1시간에 20만 원을 벌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다. 휴대전화 한 대만 있으면 일은 바로 시작할 수 있었다. ‘비건전 애인 대행’, 말 그대로 애인 역할을 대신 해주면서 성매매를 하는 것이다. “6개월인가 했어요. 하루에 한 명씩요. 20대 젊은 대학생도 만나봤고 아저씨들도 만나봤어요. 그날 하루 살 돈은 그렇게 마련했지만 하루하루 갈수록 밥을 씹어 넘길 힘이 없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더라고요. 사람이 할 짓은 아니었어요.”

지은이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함께 찜질방과 길거리를 몰려다니던 친구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청소년 상담지원센터인 ‘1318’로 전화해 지난해 쉼터에 입소했다. 성매매 청소년들을 위한 쉼터는 마치 ‘엄마’ 같았다. 취업 준비하라는 잔소리도 해줬고 검정고시 학원에도 보내줬다. 그래도 정착은 쉽지 않았다. 몇 년 만에 다시 잡은 펜과 꼼짝없이 갇혀 앉아 있어야 하는 검정고시 학원은 목을 죄어 왔다. 결국 6개월 과정 단과 학원에서 한 달 반도 못 버티고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를 것 같단다. 학원이나 쉼터가 아닌 ‘학교’에 다니게 됐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지난달 29일 서울시 늘푸른여성지원센터와 새날을여는청소년쉼터가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문을 연 ‘늘푸른 자립학교’ 첫 입학생이 됐다. 머물던 쉼터에서 추천을 받아 입학한 이 학교는 가출 후 성매매 피해를 본 16∼19세 여학생들의 자립과 자활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됐다. 지은이를 비롯한 20명의 1기 입학생들은 앞으로 반 년간 매일 오전 9시 반까지 학교에 등교한다. 오전 10시부터 정오까지 수학과 국어 등 기초학습 공부와 검정고시 준비를 하고 오후 4시까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성교육과 가치관 교육, 직업교육 등을 받는다. 규율과 제도를 부담스러워하는 아이들의 특성을 고려해 교육과정은 일부러 단기 6개월 코스로 짰다. 행여나 마음이 흔들려 학교를 떠나더라도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매월 마지막 주에 수시 입학생을 받는다.

“애인 대행하던 시절 제 꿈은 오늘 잘 집이 있고 내일 먹을 밥이 있는 거였어요. 이제는 좀 욕심 내려고요. 제 꿈은 대학생이 되는 거예요. 내년 추석 때는 친척들 앞에서 수능 공부하느라 힘들다고 생색 한 번 내볼래요.” 지은이의 27일 일기장에는 ‘앞으로 열심히 아르바이트해서 6개월간 70만 원부터 모으자. 연세대 등록금은 400만 원이라니까 이렇게 꾸준히 모으면 될 거야’라고 적혀 있다. 문의 02-322-1585, 1318.seoul.go.kr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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