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생활 10년 이주노동자 하이덜씨의 ‘특별한 첫 명절’
《“추석이 지나면 꼭 웨딩 촬영을 하고 싶습니다.” 방글라데시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 라지브 하이덜 씨(24)에게 올해 추석은 특별하다. 한국인 아내 이재화 씨(32)와 4월 혼인신고를 한 뒤 처음 맞는 명절이기 때문. 한국 생활이 이미 10년째 접어들었지만 외국인에다 불법 체류자였던 그에게 한국 명절은 ‘남의 집 행사’였다. 하지만 마냥 기쁜 것만은 아니다. 불법 체류자 단속으로 2월부터 실직 중인 데다 이전의 직장에서 퇴직금마저 떼였다. 다행히 최근 직장을 구해 추석 연휴가 끝나면 일을 하게 됐지만 소중한 딸을 주신 장인 장모를 뵙기가 죄송하기는 마찬가지다.》
○ 슬픔과 기쁨의 한국 땅
방글라데시에서 옷가게를 하던 하이덜 씨는 생활고로 2000년 7월 한국에 왔다. 관광비자로 들어온 그는 비자 만료기간(3개월)이 지나면서 불법 체류자가 됐다. 5개월여 만에 철판 도색 공장에 취업했을 때만 해도 그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월급을 받는 게 너무 기뻐 기회만 되면 야근도 자청했다. 75만 원 정도였던 월급은 시간이 지나면서 130여만 원으로 올랐다. 2년 전 지인의 소개로 만난 지금의 아내 덕분에 낯선 이국 생활이지만 행복의 의미를 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불법 체류자란 한계는 그 모든 것을 앗아갔다. 올해 초부터 갑자기 단속이 심해진 것.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강제출국당했지만 결혼을 앞둔 그는 그럴 수도 없었다. 단속 때문에 출근이 어려워지자 그는 2월에 공장을 그만뒀다. 설상가상으로 퇴직금 1000여만 원도 떼였다. 하이덜 씨는 “사장님이 ‘불법 체류자 주제에 어디서 퇴직금을 달라고 하냐’며 오히려 윽박질렀다”면서 “결국 대한법률구조공단의 도움을 받아 소송을 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노동부가 한나라당 박대해 의원실에 제출한 외국인 노동자 임금체불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임금을 떼인 외국인 노동자는 모두 6849명으로 2006년 1832명에 비해 3배 이상 늘었다.
○ 피부색을 넘어선 사랑
장인 장모는 처음부터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외국인에 불법 체류자인 데다 딸이 타향에서 살게 될까봐 걱정됐던 것. 이 씨의 하소연에도 아버지는 “절대 안 된다”며 막았다. 이 씨는 조금 더 개방적인 어머니를 먼저 설득했고 어머니와 딸의 노력으로 결국 아버지도 설득할 수 있었다. 이 씨는 “하루는 데이트를 위해 만났는데 얼굴에 페인트가 튀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며 “순수하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끌렸다”고 말했다.
하이덜 씨 부부는 경기 동두천시의 작은 사글셋방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두 사람이 편히 눕기도 모자란 공간. 생활비는 이 씨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버는 월 50여만 원이 고작이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인지 조금씩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이덜 씨는 최근 새 직장을 구해 추석 연휴가 끝나면 출근을 시작한다. 불법 체류자 신분도 한국 여성과 결혼한 덕분에 해결됐다. 하이덜 씨는 지난달 법무부에 자진 신고를 하고 정식으로 취업 및 거주가 가능한 비자를 얻었다. 퇴직금 반환 소송은 승소율이 90%가 넘기 때문에 돈을 돌려받을 가능성이 높다.
○ 송편도 빚고, 제사도 지내고…
처음으로 한국 명절을 지내는 하이덜 씨는 이번 추석을 어떻게 보낼지 기대가 크다. 비록 모든 것이 당당하지는 않지만 최대한 밝고 든든한 사위 모습을 보여드릴 생각이다. “이미 드릴 선물도 다 장만했다”고 말하는 하이덜 씨의 목소리에 유난히 힘이 들어간다. 지난달 고국에 갔다 올 때 가방, 옷 등 방글라데시 특산품을 추석 선물로 마련했다. 9년이나 한국에 살고 있지만 그는 아직도 추석 때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른다. 그는 “송편도 만들고 차례도 지내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겠다”고 말했다. 부부는 퇴직금을 받고 월급을 받으면 가장 먼저 웨딩 촬영을 할 계획이다. 형편상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이덜 씨는 “형편이 좀 나아지면 내년에는 아이를 갖고 싶다”며 “한국에서 이렇게 특별한 명절을 지낼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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