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까지는 러시아 등 외국 배를 빌려 타고 2시간가량 ‘감질나게’ 남극 대륙기지 후보지를 둘러봤지만 이제 마음 놓고 연구할 수 있게 돼 많이 기대되고 가슴이 벅찹니다.”
국내 첫 쇄빙선인 아라온호를 타고 12월 남극으로 떠나는 한국해양연구원 부설 극지연구소 신형철 책임연구원(45)이 밝힌 소감이다. 아라온호는 5개 남극 대륙기지 후보지 가운데 가장 유력한 서남극 마리버랜드의 케이프벅스에 대한 연구 조사를 위해 처음으로 출항한다. 아라온호는 한진중공업에서 제작했으며 배 이름은 ‘모든 바다를 누빈다’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85명이 정원인 아라온호에는 승무원들과 함께 연구원 20명이 승선해 30여 일 일정으로 남극에서 첫 연구활동을 벌인다. 연구원 중 상당수가 남극을 여러 차례 다녀온 베테랑이지만 우리 배를 처음 타는 데 대한 설렘은 감추지 못했다.
남극 세종과학기지는 남극대륙 옆의 킹조지 섬에 있다. 그래서 빙하연구 등 대륙에서 주로 이뤄지는 연구에는 제약이 많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06년부터 남극 대륙에 별도의 기지를 건설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29개국이 남극에서 기지를 운영하고 있으며 남극반도와 남극대륙에는 32개 상주기지가 있다. 선진국들은 남극 연구가 자원개발은 물론 지구온난화에 따른 대응책 등을 마련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해 각별히 공을 들이고 있다. 김지희 선임연구원(40·여)은 “후보지의 지질, 지형, 기상 등을 파악하고 기지 건설 시 환경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담은 환경영향평가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연구원들은 아라온호를 ‘남극의 신발’이라고 불렀다. 한국인 남극연구원 1호로 12월 출발하는 연구단의 책임자인 김예동 박사(55)는 “쇄빙선 없이 남극을 다니는 것은 맨발로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며 “이제 ‘신발’을 신고 남극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게 됐다”고 기뻐했다. 최태진 선임연구원(40)은 “다른 나라 배를 얻어 타고 가면 하나의 부품 역할밖에 못한다는 생각에 위축됐는데 이제는 한국의 입장에서 연구 목적을 정하고 프로그램을 짜고 있다”고 말했다.
남극에서의 연구 활동은 결코 녹록지 않다. 쇄빙선에서는 쇳덩이가 얼음을 찢는 어마어마한 굉음을 들으며 잠을 청해야 한다. 변화무쌍한 날씨 앞에서 위험에 빠지기도 하고 오랜 기간 공들인 연구결과물을 허망하게 날려 보내기도 한다.
몇 년 전 신 책임연구원은 남극에 있는 생명체와 물질을 파악하기 위해 고깔모자처럼 생긴 연구장비를 바닷속으로 내려보내 바다에 가라앉는 입자(粒子)들을 1년간 모았다. 하지만 장비를 수면 위로 거의 다 끌어올린 순간 강풍이 불어 2개 중 1개를 날려 보내야 했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극지연구소 연구원들은 최근 세종기지에서 발생한 폭력사건으로 극지연구의 의미가 퇴색되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구 여건이 개선된 만큼 연구에 더욱 전념하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김 박사는 “본격적인 남극 연구 영토 확장을 위한 첫 번째 디딤돌을 놓겠다”고 다짐했다.
인천=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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