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으로 북한 인민군이 물밀 듯 남하하던 1950년 7월 24일. 전남 구례경찰서 안종삼 서장(1903∼1977·사진)은 유치장에 수감된 보도연맹원 480여 명을 경찰서 뒷마당에 모이도록 했다. 그는 연단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나는 지금 목숨과 맞바꿔야 할 중대한 결의의 순간에 있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을 모두 방면합니다. 이 조치로 내가 반역으로 몰려 죽을지 모르지만…. 혹시 죽으면 나의 혼이 480명 각자의 가슴에 들어가 지킬 것이니 새사람이 돼 주십시오. 선량한 대한민국 백성으로 말입니다.”
부임한 지 1년이 갓 지난 안 서장은 이틀 전 상부로부터 좌익인사로 지목된 사람들을 처형하고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8년 여수·순천 10·19사건(여순사건)을 경험한 지역 유지들이 “더 많은 희생은 안 된다”고 간청하자 그는 고민 끝에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이들을 풀어줬다.
당시 구례경찰서가 좌익 활동이 두드러진 800여 명 중에서 480여 명을 적극 가담자로 분류해 유치장에 가둬 놓은 상황에서 이들을 살려준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당시 부하 경찰관들은 “그들을 보내면 우리 식구들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며 불안해했지만 안 서장은 결단을 내렸다.
그의 선처로 구례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좌익 극렬분자로 지목된 30여 명이 사살되기도 했지만 희생자는 다른 지역에 비해 극히 적었다.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도 경찰 가족을 포함한 보복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다.
전세(戰勢)가 뒤집혀 1951년 1월 다시 구례서장에 부임한 그는 인민군 잔당을 소탕하고 치안을 확보한 공로로 내무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그해 4월 안 서장이 전북 남원시 지리산지구경찰전투사령부로 발령이 나자 주민들은 그의 공덕을 기려 ‘은심동정호 덕고방장산(恩深洞庭湖 德高方丈山·은혜가 동정호 같이 깊고 덕은 방장산처럼 높네)라는 시구(詩句)가 담긴 10폭짜리 병풍을 선물했다.
안 서장의 공적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서를 통해 공개됐다. 안 서장의 셋째아들인 안승순 씨(75·전 곡성군수)는 “아버지의 공적이 정부 공식 문서에 기록돼 다행”이라며 “결정서에는 이념갈등을 넘어 생명을 중시한 아버지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말했다.
구례=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보도연맹:
이승만 정부가 ‘남한 내 좌익세력을 전향시켜 선량한 국민으로 만든다’며 1949년 4월에 만든 단체. 정식 명칭은 국민보도연맹으로 가입자 수가 30만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6·25전쟁이 터지자 정부는 보도연맹원을 북한에 동조할 수 있는 위험세력으로 간주해 가입자들을 구금하거나 즉결 처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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