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결혼에 관하여
유학 마치자마자 귀국해 결혼
어머니의 적극 찬성도 한몫
친구처럼 지냈지만 서로 존중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50년대 후반 미국에서도 내가 전공한 화학과 졸업생은 기업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미국 유학을 같이 떠났던 고등학교 친구 대부분은 한국에서 일하기보다는 미국에 살면서 취직하려고 했다. 한국이 전쟁 뒤의 폐허상태였으므로 현실적으로 한국에 오고 싶어도 자신의 전공을 살릴 취업 기회가 거의 없었다.
나도 대학 3학년 때부터 미국 기업은 물론 이고 다국적 기업 등 큰 회사 여러 곳에서 취업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남편이 미국까지 찾아와 끈질기게 청혼했는데 결혼을 약속하지 않았다면 미국에서 취직해 살았을지 모르겠다.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남편은 출장을 핑계로 미국에 있는 나를 자주 찾아왔고 우리 학교에도 얼굴을 자주 보여 그의 존재는 이미 결혼 전부터 대학 안에서 유명했다. 일부 수녀 교수는 “왜 저렇게 좋은 사람과 결혼하지 않느냐. 이해를 못 하겠다”고도 했다.
결국 나는 대학을 마치자마자 서울로 돌아왔고 23세 되던 1959년 6월 서울 중구 신당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을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어머니가 원하셨기 때문이다. 오빠 친구이기도 했던 그 사람은 제주도가 고향이어서 타향살이에서 외로움을 탔는지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면서 어머니와 매우 가까워졌고, 내가 미국에 유학을 가 있는 동안에도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사위와 어머니 사이가 부부 사이보다 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결혼 후 10여 년간은 전업주부로 살았다. 어떤 이는 1950년대에 흔치 않은 미국 유학까지 다녀와서 사회생활을 하지 않은 데 대해 공부한 게 아깝지 않느냐고 했다. 하지만 공부한 내용을 활용할 사회적 여건이 안 됐고, 여성이 일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남편도 사회생활을 원하지 않았다. 신혼살림은 친정이 있는 혜화동에 차렸다. 남편은 닭요리를 좋아해서 동대문시장에 가면 매번 닭을 사왔다. 하도 닭을 많이 사니 가게 주인이 내 친구에게 살짝 “저이는 뭐 하는 사람인데, 저렇게 닭을 자주 사 가느냐?”고 물었던 기억이 있다.
남편은 사회생활을 원치 않았지만 유학까지 다녀온 내 능력을 존중했던 것 같다. 회사로 온 영어 편지나 화학 관련 원서를 종종 집으로 들고 와 내용을 알려달라고 물었다. 결혼 무렵 영등포 공장을 짓기 시작한 때여서 외국에서 기계설비에 대한 설명서가 날아들었고, 이를 번역하는 일은 모두 내 차지였다.
한 번은 남편이 기계에 관한 설명이 담긴 팸플릿을 잔뜩 들고 와서는 어떤 기계가 더 좋겠느냐고 의견을 물었다. 화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기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 있게 대답을 못 했더니, 남편이 내가 “헛 유학을 했다”고 놀렸다. 남편이 외국 손님의 통역을 부탁할 때면 오랜만에 영어를 써먹을 수 있어서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남편은 나를 항상 아내이자 친구로서 존중했고, 나 또한 그런 남편을 존경했다. 4남매 중에서 외모만 따지면 둘째 아들(채동석 현 애경그룹 유통 및 부동산개발부문 부회장)이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 꼼꼼한 성격은 네 아이가 모두 닮았다.
내가 남편과 둘만의 순수한 줄다리기를 통해 결혼해서인지 자식들도 배우자를 스스로 찾아 결혼했다. 장남(채형석 현 애경그룹 총괄부회장)은 대학 3학년 때 학교에서 만난 아가씨와 사귀다가 결혼한 캠퍼스 커플이고, 차남은 대학 때 미팅에서 만나 결혼했다. 내 올케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을 딸에게 소개했는데 둘이 연애해서 결혼했다.
우리 아이 중 셋은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배우자를 결정했고 결혼을 일찍 해서 중매가 들어올 여지가 없었다. 자식들의 결혼이 빨라 나는 일찌감치 할머니가 됐다. 결혼이란 사랑으로 시작하고 우정으로 지속된다고 한다. 가장 이상적인 부부관계는 친구처럼 가까우면서도 서로 존중해주는 우정으로 가득 찬 관계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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