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항공업 진출해 제주 취항 남편 고향과 오랜 인연이 한몫 국제선 늘리며 신성장 동력으로
좋은 기업은 당장의 성과도 중요하지만 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갖추고 있다. 요즘 들어 여러 기업이 미래 성장동력을 찾기 위해 분주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애경그룹은 10여 년 전부터 신성장동력을 찾아 꾸준히 움직였다. 비누 세제 치약 샴푸 화장품 등 계면활성제와 화학물질에서 벗어나 1990년대 초 유통업에 진출해 백화점(AK플라자)과 면세점(AK면세점)을 개점한 데 이어 부동산 개발사업에도 진출해 사업을 펼쳐 나갔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생명공학기술(BT·네오팜), 정보기술(IT·AKIS) 기업에 이어 항공업(제주항공)에도 진출했다.
애경의 전신은 창업주인 남편(채몽인)이 1951년 설립한 대륭산업㈜이다. 이후 1954년 6월 9일 애경유지공업㈜을 설립하면서 정식으로 애경의 역사가 시작됐다. 남편이 1970년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같은 해 10월 삼경화성(현 애경유화)을 설립해 생활용품에 이어 기초화학 생산업체로 1990년대 말까지 사업을 40년가량 이어왔다. 유통업에 진출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지는 16년이 됐다.
유통업이 어느 정도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해 나가면서 신성장동력으로 삼고자 진출한 분야가 항공사업이다. 2004년 제주도의 항공사업 파트너 공개모집에 참여했고, 이듬해 애경그룹이 75%, 제주도가 25%를 공동 출자해 민관 합작법인 형태의 ㈜제주항공을 설립했다. 항공사업 경험이 없는 애경이 제주도와 합작으로 국내 제3의 민간 항공사를 설립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제주도와의 인연은 애경의 창업주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도 출신인 남편은 제주도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명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직장생활을 잠시 하다 광복 후 귀국해 애경을 창업했다. 재계에서 유일한 제주도 출신 기업인이었던 남편의 갑작스러운 장례식을 치르고 나니 부의금이 꽤 모였다. 나는 남편을 생각해 부의금을 모두 서울에 있던 제주장학회에 기증했다. 이런 인연 덕분에 2005년 제주도민회 총회에서 감사패를 받았다. 자식들에게 제주도는 제주도민을 사랑했던 채(蔡)씨 집안의 내력이 남아 있는 각별한 애정이 있는 고향이다.
이제까지 큰아들(채형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이 무슨 일을 해보겠다고 했을 때 한 번도 ‘노(No)’라고 한 적이 없다. 큰아들이 제주도를 기반으로 항공사를 설립하려 하는데 제주도가 운영하기는 힘들어 민관합작 형태의 회사를 설립하겠노라고 했을 때도 기꺼이 해보라고 했다. 앞으로 해외여행과 항공여행이 늘어날 텐데 기존 항공사만으론 수요를 감당하기가 힘들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제조업체의 최고경영자로 30여 년간 일하면서 생산성 향상을 위해 품질 연구와 개발, 양질의 노동력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첨단 과학기술이 모두 집약된 항공사업은 어떤 분야보다 어려운 업종이었기에 “우리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한 적도 있었다. 내 걱정이 기우였음을 입증이라도 하듯 어느새 300만 명을 실어 날랐고, 우리나라의 세 번째 국적기이자 제3민항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이제는 국제선에 속속 취항하는 등 애경의 미래를 짊어질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지난주 애경 화학계열사의 합작 파트너인 일본 기업의 초청으로 일본 오사카(大阪)에 다녀왔다. 인천공항에서 제주도를 상징하는 돌하르방의 로고를 그린 감귤색 제주항공을 타보니 189석 가운데 빈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제주항공이 인천∼오사카, 인천∼기타큐슈(北九州), 인천∼방콕 등 기존 국제노선에 이어 27일부터 김포공항에서 오사카 직항 비행기를 매일 띄운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애경은 6월 창립 55주년을 맞았다. 창립 100년에는 애경이 어떤 사업을 영위하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어떤 제품과 서비스를 판매하더라도 우리 국민이 원하는 상품을 내놓겠다는 게 애경의 기업철학이다. 소비자가 원하고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고 실행하는 일이 앞으로 애경이 나아갈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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