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UPI통신에 소개된 이츠하크 아로노보비치 선장의 모습. 그는 1960년대 초반 컬럼비아대에서 경영학 공부를 했다. 유족으로는 두 딸과 7명의 손자 손녀가 있다. 사진 출처 뉴욕타임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인 1947년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4500여 명의 유대인 생존자를 배에 태워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려다 이를 막는 영국 해군과 충돌한 엑소더스호의 선장 이츠하크 아로노보비치 씨가 23일 86세를 일기로 이스라엘 북부에서 숨졌다고 뉴욕타임스가 24일 보도했다.
1923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그는 10세 때 가족과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2차 대전 중에는 유대인 지하 민병조직인 ‘하가나’의 일원으로 영국과 노르웨이 상선에서 활동했다. 1946년 하가나는 유대인들을 영국 통치하에 있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하고 엑소더스호를 사들였다.
1947년 7월 11일 프랑스 남부에서 유대인을 태운 엑소더스호는 일주일 만인 7월 18일 팔레스타인 해안에 근접했다.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유입을 통제하던 영국 해군은 이들의 상륙을 막으려 했고 엑소더스호는 저지선 돌파를 시도하면서 양측이 충돌했다. 유대인들은 배 안에 있던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며 저항했고 영국 해군이 결국 발포하면서 유대인 3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했다. 유대인들은 프랑스를 거쳐 독일로 보내져 집단 수용됐다.
팔레스타인 땅을 밟지 못하고 결국 독일로 이송된 이들의 딱한 사연은 세계적인 동정심을 불러일으켰으며 각국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또 이듬해인 1948년 이스라엘 건국에도 적지 않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은 23일 “아로노보비치 선장은 이스라엘에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여를 했다”며 “그는 개척과 용기, 동포애의 조합이었다”고 밝혔다. 엑소더스호 사건은 1958년 소설에 이어 1960년 폴 뉴먼 주연의 영화가 ‘엑소더스’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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