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50년만에 푼 학업중단 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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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19일 03시 00분


연희전문 재학중 6·10만세운동
무기정학 받고 8년 수감후 출소
연대, 故한일청 씨에 명예졸업장

지난해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게 돼 한자리에 모인 고 한일청 씨의 가족. 가운데 한복을 입은 이가 맏딸 한동이 씨이며 다른 사람들은 조카와 손자, 손녀들이다. 사진 제공 한윤동 씨
지난해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게 돼 한자리에 모인 고 한일청 씨의 가족. 가운데 한복을 입은 이가 맏딸 한동이 씨이며 다른 사람들은 조카와 손자, 손녀들이다. 사진 제공 한윤동 씨
“위 사람은 연희전문학교 학생으로서 6·10만세운동 참가 등 대한민국 독립과 국가 건립에 기여하는 활동을 하다 안타깝게도 학업을 마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연세대에서는 고인의 애국정신을 기려 명예졸업증서를 수여합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학업을 중단하고는 평생 가슴속에 아쉬움을 품어오던 중 1960년 세상을 뜬 고인에게 50년 만에 대학 졸업장이 주어진다. 연세대 문과대는 연희전문 문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6년 당시 6·10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투옥돼 무기정학을 받았던 한일청 씨(1899∼1960)에게 22일 졸업식에서 명예졸업장을 수여키로 했다.

한 씨는 6·10만세운동 등 독립운동 등을 벌이다 감옥생활만 8년 넘게 했다. 그는 연희전문 2학년이던 1926년 6월 친구들과 명함인쇄기를 구해 하숙집에서 합숙을 하며 격문(檄文) 수만 장을 인쇄해 태극기와 함께 뿌리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격문 내용은 “이천만 동포여 원수를 구수(拘囚·잡아가두다)하라! 피의 값은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 동아일보 1926년 6월 17일자 2면에도 소개된 이 사건으로 그는 경성지방법원 조사국에서 집행유예를 선고 받고 연희전문에서 무기정학을 당했다. 이후 잠시 일본으로 건너가 짧은 기자생활을 하고 돌아온 뒤에도 그는 1930년대 ‘재경성학생 사회과학연구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사회주의 계열의 학생운동을 벌였다. 교사들과 농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계몽운동을 펼치다 체포돼 5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광복이 되고 6·25전쟁이 끝난 뒤에 한 씨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드러내지 못했다. 1930년대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을 잠시 펼친 이유로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했기 때문. 그는 자녀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한 씨의 속내를 잘 알던 조카 한윤동 씨(72)만이 “독립운동을 하신 어른인데…”라면서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못다 한 학업에의 욕심도, 자신의 공을 알리지 못한 아쉬움도 뒤로 한 채 한 씨는 1960년 갑작스러운 고혈압으로 운명했다.

잊힐 수도 있었던 한 씨의 발자취가 드러난 것은 1984, 85년경 학위논문을 쓰던 한 학생의 방문 때문이었다. 조카 한 씨는 “계명대 박사 과정의 한 학생이 후손도 모르는 자료들을 모아가지고 논문을 써도 되겠느냐며 찾아왔는데 그때부터 열심히 장롱을 뒤져가며 어르신의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모은 자료로 후손들은 2004년 보훈처를 찾는 등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드디어 한 씨는 지난해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데 이어 이번엔 그토록 안고 싶어 하던 졸업장까지 품게 됐다.

훈장과 졸업장 수여 작업을 주도한 조카 한 씨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꼭 해야 할 숙제를 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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