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독일 유학 중에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갔다가 홀로 탈출에 성공했던 오길남 씨(68·사진)가 22일 워싱턴포스트(WP)와 인터뷰를 갖고 과거를 뼈저리게 후회했다. 탈북 후 남한사회에 정착해 한 정부출연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재직하다가 퇴직한 오 씨는 지금도 술에 의존해 과거의 고통 속에서 자책하면서 하루하루 살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북한의 잔악함에 파괴된 한 가족과 양심’이라는 제목으로 WP가 보도한 오 씨의 사연은 다음과 같다.
1942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부산고와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한 오 씨는 1985년 독일 브레멘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43세에 받은 학위라 강단에 서기 힘들어 방황하면서 한국 정부에 대한 불만을 쏟아낼 때 북한 공작원들의 눈에 띄었다. 공작원들은 오 씨에게 접근해 평양에 가면 간염을 앓고 있던 아내 신숙자 씨의 병을 고쳐주고 최상의 교수 대접을 해주겠다고 꾀었다. 오 씨는 아내와 두 딸을 이끌고 동독과 소련을 거쳐 북한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산속 군 기지에 끌려갔다. 수개월 동안 김일성의 교시들만 반복 학습해야 했다. 이후 독일로 돌아가 한국 유학생들을 포섭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물론 가족의 동행은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한국 유학생을 데려오겠다고 하자 아내가 양심상 그렇게 하지 말라고 내 얼굴을 때리더군요. 북한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말라고 했죠. 가족이 다 죽었다고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1986년 독일에 파견된 오 씨는 곧바로 북한 공작원들을 따돌리고 잠적한다. 그러자 북한은 오 씨의 가족을 ‘15호 수용소(요덕수용소)’에 수감했다. 1992년 오 씨가 한국대사관에 자수하기 전까지 북한 공작원들은 수용소에 수감된 아내의 자필 편지와 사진, 딸의 음성이 녹음된 테이프를 건네며 그의 마음을 돌리려 애썼지만 그는 한국행을 택했다. 오 씨 가족의 생사는 지금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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